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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파괴적 구원: 비혼과 가족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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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패러다임이 붕괴하고 있다. ‘정상 가족’이라 불리던 견고한 성채는 이제 낡은 유물이자 해체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그 중심에는 기존 질서를 ‘억압’으로 규정하고 그로부터의 탈출을 ‘해방’으로 명명한 페미니즘의 강력한 내러티브가 존재한다. 비혼과 비출산은 더 이상 소수의 일탈이 아닌, 진보적 정체성을 증명하는 가장 선명한 기호가 되었다.

그러나 이 거대한 해방의 서사 이면에는 누구도 말하지 않는 질문이 있다. 모든 낡은 구조를 파괴한 뒤, 그 폐허 위에서 개인은 진정 자유로워지는가? 역설적이게도, 가족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진 여성이 마주하게 될 미래는 완전한 해방이 아니라,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차원의 시스템적 고립과 취약성일 수 있다. 이것은 구원을 향한 여정이 자기 파괴로 귀결되는, 거대한 아이러니에 관한 탐구다.

가족의 해체: 비판을 넘어선 ‘해체’의 엔지니어링

페미니즘이 수행한 가장 강력한 작업은 가족이라는 제도를 ‘문제 해결’의 대상이 아닌 ‘문제 자체’로 재규정한 것이다. 가부장제, 성 역할, 독박 육아 등의 키워드는 가족 시스템 내에서 개선해야 할 버그(bug)가 아니라, 시스템의 근간을 이루는 수정 불가능한 악성 코드(malware)로 규정되었다. 이 프레임 안에서 결혼은 여성의 자아실현을 억압하는 계약이며, 출산과 육아는 경력 단절과 희생을 강요하는 족쇄로 해석된다.

이러한 담론은 개인의 자유를 최상위 가치로 격상시키며, 가족이라는 관계적 네트워크를 개인의 무한한 가능성을 제약하는 족쇄로 여기게 만들었다. ‘나’라는 주체의 자율성이 가족이라는 공동체적 가치보다 우위에 놓이면서, 가족의 해체는 단순한 선택지를 넘어 도덕적 우위를 점하는 행위로 탈바꿈했다. 소셜 미디어는 이러한 ‘탈주 서사’를 끊임없이 전시하고 강화하며, 비혼과 비출산을 ‘깨어있는 여성’의 가장 급진적인 자기표현으로 미학화(aestheticization)했다.

시스템의 부메랑: 돌봄의 진공과 책임의 외주화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가족은 불완전하고 때로는 억압적이었을지언정,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효율적인 ‘상호 돌봄 생산 유닛’이었다. 이 탈중앙화된 복지 시스템의 해체는, 그 기능을 대체할 실질적 대안 없이 거대한 ‘돌봄의 진공(care vacuum)’ 상태를 만들어낸다.

특히 노년기에 접어든 비혼, 비출산 여성은 이 시스템 붕괴의 직격탄을 맞게 된다. 질병, 경제적 위기, 정서적 고립이라는 피할 수 없는 리스크 앞에서, 과거 가족이 수행했던 1차 방어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는 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없다. 국가의 복지 시스템은 최소한의 안전망일 뿐, 가족이 제공하던 상시적이고 친밀한 수준의 돌봄을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는 본질적으로 ‘스케일’의 문제다.

이 지점에서 더욱 불편한 질문이 제기된다. 바로 ‘책임의 외주화(outsourcing of responsibility)’ 문제다. 출산과 양육의 사회적 책임을 회피한 세대가, 자신의 노후를 ‘타인이 낳아 기른 다음 세대’의 세금과 노동력에 의존하는 현상을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 이는 세대 간 연대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사실상의 세대 간 착취 구조이며 지속 불가능한 폰지 사기(Ponzi scheme)와 같다. ‘모두가 비혼을 선택할 때, 우리 사회는 누가 부양하는가?’라는 질문에 이 시스템은 답할 수 없다. 사회적 연대라는 개념은 공동의 책임과 기여를 전제로 할 때만 성립하는 도덕적 계약이기 때문이다.

결론: 해방의 끝에서 마주한 새로운 예속

페미니즘이 기획한 가족 해체와 비혼의 서사는 ‘완전한 자율성을 획득한 개인’이라는 이상적 주체를 상정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자율적 주체의 탄생이 아니라, 그 어떤 보호막도 없이 시스템 리스크에 맨몸으로 노출된 ‘파편화된 개인’의 등장이다.

가족으로부터의 해방은 결국 국가와 자본이라는 더 거대하고 비인격적인 시스템에 예속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제 개인은 자신의 노후를 위해 국가의 복지 시스템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며, 이는 결국 미래 세대의 더 큰 부담과 통제로 이어진다.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파괴했던 성벽이, 사실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던 마지막 보루였을지 모른다는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비혼과 가족 해체는 선택의 문제이지만, 그 선택의 결과가 만들어낼 시스템의 역설에 대해서는 이제 우리 모두가 답해야 할 시간이다.

새 정부 내각, 낡은 관행의 답습인가: 정치인 포진에 대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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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공개된 첫 내각 인선은 ‘파격’이라는 수식어 아래 실로 개탄스러운 한 가지 특징을 선명히 드러내었다. 이는 곧 현직 또는 전직 국회의원 출신 정치인들이 다수 주요 장관직 후보에 지명되었다는 점이다. 국무총리 후보자를 필두로 국방부, 외교부, 통일부 등 국가의 명운(命運)이 걸린 핵심 부처의 수장 자리에 정치인들이 대거 포진함은, 새 정부가 과연 국민을 위한 혁신을 지향하는지, 아니면 구태의연한 정치적 셈법에 갇혀 있는지를 묻게 하는 지점이다.

물론, 정치인 장관 기용을 옹호하는 이들은 대통령의 국정 철학을 깊이 공유하고, 국회와의 소통을 원활히 하며, 강력한 리더십으로 정책 추진에 구동력을 부여할 수 있다는 피상적인 논리를 내세운다. 허나 이는 본질을 외면한 허울 좋은 변명에 불과하다. 지금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정략적 감각이 아닌, 산적한 국난(國難)을 돌파할 실질적 역량과 전문성이다.

하지만, 대다수 전문가와 시민사회는 이러한 ‘정치인 위주 내각’에 대하여 차가운 시선과 깊은 불신을 표명하고 있다. 첫째, 전문성 결여에 따른 국정 공백의 심화는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각 부처의 정책은 단순한 이념적 구호가 아닌, 고도의 전문 지식과 치열한 실무 경험에서 비롯된 통찰력을 요구한다. 정치적 인지도로만 장관직에 앉은 이들이 거대한 행정 조직을 이끌고 복잡다단한 현안을 해결할 수 있을까. 이는 곧 국민의 삶과 직결되는 정책 추진의 난맥상으로 이어질 뿐이다.

둘째, 국정의 사사화(私事化) 및 공정성 훼손이라는 치명적인 문제이다. 장관은 특정 정당이나 특정 세력의 대리인이 아닌, 오로지 국민 전체를 위한 봉사자로서 준엄한 책무를 다하여야 한다. 허나 선거를 통해 입신양명(立身揚名)한 이들이 내각에 대거 진입함은, 정책 결정 과정에 개인의 정치적 야망이나 다음 선거를 의식한 얄팍한 셈법이 개입될 수 있다는 의구심을 증폭시킨다. 이는 곧 행정의 공정성과 도덕성을 뿌리째 흔드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셋째, 입법부 견제 기능의 형해화(形骸化) 및 삼권분립 정신의 유린이다. 본래 행정부를 견제하고 감시해야 할 입법부의 구성원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행정부로 이동함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인 삼권분립의 균형추를 무너뜨리는 행위나 다름없다. 이로 인해 행정부의 독주를 막을 견제 장치가 무력화되고, 권력 분립이라는 헌법적 가치가 오직 명목상으로만 존재하게 될 위험성이 증대된다.

마지막으로, ‘자리 나눠먹기’라는 구태의 반복에 대한 국민적 지탄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국정 운영의 효율성이나 인재 등용의 원칙보다는 정치적 공로나 연고에 따른 인선이라는 인상을 주는 한, 국민들은 새 정부의 인사에 대하여 깊은 실망감을 표출하며 국정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킬 수밖에 없다. ‘국민을 위한다’는 고매한 수사는 오직 국민의 눈에 비친 ‘나눠 먹기’라는 냉혹한 현실 앞에서 허망하게 무너질 뿐이다.

새 정부는 혁신과 변화를 약속하며 출범하였다. 허나 그 첫 단추인 내각 인선에서부터 낡은 관행과 정략적 셈법이 엿보인다면, 국민은 더 이상 정부의 진정성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인 장관들은 당리당략을 초월하여 오직 국민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엄숙한 의지를 행동으로 증명해야 할 것이며, 그렇지 못할 경우 역사와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새 정부가 진정한 국민 통합과 미래 지향적 국정 운영을 위한 결단이 무엇인지 깊이 성찰해야 할 시점이다.

노총(勞總)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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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노동계, 그중에서도 일부 기득권 노조들의 추악한 민낯이 드디어 드러나고 있다. 온갖 저항과 궤변에도 불구하고 회계 투명성이라는 시대의 요구는 결국 관철되었고, 그들의 재정은 마지못해 강제로 공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다. 이제 와서 드러나기 시작한 불투명한 흑막을 다시 감추기 위해 발버둥 치는 행태야말로, 이들이 얼마나 뻔뻔하고 후안무치한 집단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명분 없는 ‘노동 탄압’ 주장과 ‘자주성 훼손’이라는 낡아빠진 피해자 코스프레는 이제 지겹다 못해 역겹기까지 하다. 이미 투명성을 강제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되돌리려 획책하는 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가? 회계 공개가 시작되자마자 숨겨왔던 비리나 방만한 운영이 드러날까 두려워, 다시금 깜깜이 주머니로 회귀하려는 발악에 불과하다. 국민의 피 같은 세금으로 운영되고, 조합원의 회비로 굴러가는 조직이 회계 투명성을 거부한다는 것 자체가 절도나 다름없는 파렴치한 행위이다. ‘자주성’이라는 고귀한 가치를 자신들의 비루한 탐욕을 가리는 방패로 삼지 말라! 국민은 더 이상 그들의 위선에 속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 이 순간에도 일부 귀족 노조들의 이기적인 행태는 대한민국 경제를 좀먹고 있다. 대기업 정규직이라는 특권 의식에 젖어, 자신들의 배만 불리기 위한 과도한 임금 인상과 무자비한 파업을 일삼는다. 회계가 공개되기 시작했으니, 이제 그들의 막대한 재정과 비상식적인 지출 내역이 속속들이 드러날 것이다. 그들은 노동시장의 90%를 차지하는 비정규직,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피와 땀 위에서 기생하며, 청년들의 일자리를 강탈하고 미래를 파괴하는 사다리 걷어차기의 선봉에 서 있다. 이들의 탐욕은 이미 임계점을 넘어섰고, 이는 ‘노동 존중’이라는 가치를 처참히 짓밟는 행위다.

툭하면 ‘파업’을 입에 달고 살면서 산업 현장을 볼모로 잡는 무책임한 행태도 여전하다. 불투명한 회계를 등에 업고 감행했던 과거의 파업들이 과연 얼마나 정당했는지, 이제는 그 모든 것이 회계 공개를 통해 만천하에 드러날 판이다.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서라면 국가 경제의 근간마저 흔들고, 국민들에게 불편과 고통을 안기는 **’갑질’이자 ‘자해 행위’**는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결론은 명확하다. 노동계는 더 이상 낡은 이념과 궤변으로 자신들의 비리와 탐욕을 덮으려 하지 말라. 이미 시작된 회계 투명성의 흐름을 되돌리려는 시도는 결국 그들의 추악한 민낯만 더욱 선명하게 드러낼 뿐이다. 국민은 눈뜬 장님이 아니다. 시대의 변화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썩어가는 동아줄을 붙잡고 발버둥 치는 노동조합은 결국 국민에게 버림받는 결말 뿐임을 똑똑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태양광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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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태양광을 필두로 한 재생에너지 산업을 대한민국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서슴없이 드러냈다. 기후 위기 대응과 미래 산업 전환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운운하는 것은 이제 지겨운 상투어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난 민주당 정권들이 보여준 재생에너지 정책이 과연 그 허울 좋은 목표에 걸맞은 ‘전략적이고 치밀한’ 행보였는지, 또한 국가 에너지 안보의 핵심인 원자력을 왜 그리 무모하게 내팽개쳤는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의구심을 표명한다.

솔직히 직설적으로 비판한다. 민주당 정부의 재생에너지 정책은 국내 산업 육성에는 단 한 줌의 진정성도 없었고, 오로지 단기적인 보급 목표 달성에 미쳐 있었다. 그 맹목적인 과정에서 중국산 제품 수입에 광적으로 매달렸다는 맹렬한 비판, 결코 피할 수 없다. ‘성장 동력’이니 뭐니 목청껏 외쳐댔지만, 결국 ‘중국 태양광 산업의 배만 불려준’ 파렴치한 결과 아닌가? 이 잔인한 현실을 어떻게 부정하겠는가!

문재인 정부 시절 ‘탈원전’ 광풍이 불면서 재생에너지 확대가 무분별하게, 그리고 무모하게 추진되었다. 이는 단순히 재생에너지 증대를 넘어, 안정적인 전력 공급의 핵심 축이던 원자력 발전소까지 강제로 멈추고 신규 건설 계획을 백지화하는 만행이었다. 정작 국내 기업의 기술 개발이나 경쟁력 강화 같은 장기적이고 치밀한 전략은 철저히 방기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 기술력과 인프라를 스스로 파괴하는 자해 행위였다. 좁은 땅덩어리에 까다로운 입지라는 현실적인 제약을 외면하고, 오직 양적인 확대에만 영혼을 팔아넘긴 결과는 고스란히 중국산 저가 모듈이 국내 시장을 유린하는 참극으로 이어졌다. 국내 태양광 모듈 생산 기업들은 가격 경쟁력에 짓밟혀 아예 숨통이 끊어지거나, 생산 라인마저 파괴되어야 했다. 이는 명백한 산업 기반의 학살이다.

정책 실패의 명확한 증거는 ‘농촌 태양광 사기’ 같은 역겨운 부작용에서도 추악하게 드러난다. 투기 세력이 무질서하게 난립하고 산림 파괴 논란까지 불거지는 등 무분별한 개발이 전국토를 뒤덮으면서, 재생에너지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마저 나락으로 처박히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선의만으로는 정책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현실적인 제약과 시장 원리를 무시하고 심지어 가장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에너지원을 스스로 걷어차 버리면 어떤 파멸적인 결과가 벌어지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 오점이다.

만약 재생에너지 산업을 정말로 대한민국의 미래 먹거리로 만들고 싶다면, 우리는 중국의 압도적인 가격 경쟁력과 기술력을 단순히 ‘물량으로’ 찍어 누르려 해선 안 된다. 중국은 이미 태양광 산업의 원자재부터 최종 제품까지 모든 공급망을 완벽하게 장악하며 전 세계 시장을 압살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산 수입에만 광적으로 집중하는 정책은 국내 기술 개발 역량을 뿌리째 뽑아버리고, 결국 우리는 첨단 산업의 핵심 역량마저 외국에 통째로 헌납하는 비극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미래 성장 동력이라는 건 단순히 특정 산업의 ‘규모’만 키우는 것이 아니다. 우리 기업이 그 안에서 독자적인 기술과 경쟁력을 확보하고, 고도의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민주당 정권이 보여준 재생에너지 정책은 이러한 ‘질적인 성장’은 철저히 외면하고 ‘양적인 확대’에만 탐닉했으며, 심지어 국가의 에너지 대들보인 원전까지 고의적으로 소홀히 다루면서, 그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중국의 거대한 그림자에서 벗어나려는 전략적인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맹렬한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이제는 과거의 참담한 실패를 똑바로 직시하고, 맹목적인 숫자 놀음 따위는 당장 집어치워야 한다. 우리 국토 조건에 맞는 해상풍력 같은 잠재력 있는 분야에 선택과 집중을 하고, 고효율 차세대 기술 개발에 과감하게 투자하며, 전력망 유연성 확보를 위한 기반 시설을 제대로 구축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원전을 에너지 믹스의 핵심 축으로 복원하여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이재명 대표가 떠들어대는 ‘성장 동력’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할 것이다. 더 나아가, 국내 산업 생태계를 보호하고 육성하며, 중국에 대한 비정상적인 의존도를 단호하게 끊어낼 수 있는 실질적인 정책 마련이 시급하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재생에너지 전환은 결국 특정 국가의 배만 불려주는 치욕적인 결과로 끝날 뿐이다.

왜 꼰대를 경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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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의 허울과 청년의 피: 낡은 이념이 드리운 착취의 그림자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꼰대’라는 단어는 단순히 나이 든 사람을 비하하는 것을 넘어섰다. 그것은 특정한 사고방식, 즉 시대를 읽지 못하고 자신의 경험과 이념에 갇혀 타인을 억압하는 구시대적 권위를 상징한다. 특히 청년 세대에게 ‘꼰대’는 단순히 기성세대의 한 유형이 아니다. 그들은 비현실적인 이념으로 포장된 채 청년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시대착오적인 권력의 표상이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소위 ‘진보’를 표방하며 사회 정의와 평등을 외쳐왔던 이들이, 어째서 지금 가장 불공정하고 비인간적인 착취의 주체가 되었는가?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공정’과 ‘상생’은 허울 좋은 구호일 뿐, 청년의 피와 땀을 요구하는 잔혹한 논리로 둔갑했다. 이상적인 사회 건설을 명분 삼아, 정작 현실에서는 청년들의 미래를 담보로 자신들의 기득권과 실패한 정책을 유지하려 들었다.

일례로, 비현실적인 부동산 정책은 청년들에게 ‘내 집 마련’의 꿈을 산산조각 냈고, 과도한 규제와 시대착오적인 노동관은 새로운 일자리 창출을 가로막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늘 “노력하면 된다”거나, “우리 때는 더 힘들었다”는 식의 궤변으로 청년의 절규를 무시했다. 이는 단순히 세대 간의 소통 부재를 넘어선다. 과거의 이념적 승리에 도취되어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고, 그 고통을 청년에게 전가하는 무책임한 권력의 민낯이다.

청년들이 ‘꼰대’를 경멸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들은 단순한 나이 차이를 넘어선 이념적 위선과 실질적인 착취를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와 ‘평등’을 부르짖으면서도 가장 불공정한 사회를 만들고, 그 대가를 청년들에게 치르게 하는 이들의 이중성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

이제 청년 세대는 분명히 말한다. 낡은 이념의 허울을 벗어던지고, 현실을 직시하라. 그리고 더 이상 청년의 피를 요구하지 마라. 당신들이 외면하고 착취했던 그 청년들이, 이제는 진정한 ‘새로운 세대’가 되어 당신들의 낡은 세상을 바꿀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을 기만하는 세력과 그들의 뻔뻔한 비호에 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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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총체적 난국에 빠져들고 있다. 경제는 활력을 잃고, 민생은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으며, 사회 전반은 끝없는 혼란 속에 국민들을 좌절시킨다. 하지만 더 절망적인 것은, 이 모든 위기 속에서 책임져야 할 이들은 단 하나도 책임지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서로를 비호하며 국민을 조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의 고위 공직 후보자 검증 사태는 이러한 한국 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다. 재산 형성 과정의 불투명성, 납득할 수 없는 자금 출처 해명, 그리고 국민적 의혹에 대한 해명을 묵살하는 오만함까지. 국민의 세금으로 봉급을 받는 공직자 후보가 기본적인 투명성과 성실함마저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 그런데 더 가증스러운 것은, 집권 세력이 이러한 의혹들을 애써 외면하고 감싸며 국민의 목소리를 틀어막고 있다는 점이다.

청문회 자리에서 불거진 수많은 의혹들. 후보자의 불분명한 재산 증식 과정에 대한 질문에 “장모님 용돈”이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이 나왔을 때, 혹은 “책 인세”라는 황당한 답변이 돌아왔을 때,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더욱이, 핵심적인 자료 제출을 거부하며 “전례가 그렇다”는 뻔뻔한 태도를 보일 때, 집권 세력은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추궁하거나 책임을 묻지 않았다. 오히려 “야당의 정치 공세”라며 후보자를 옹호하고 방어막을 쳐주는 데 급급했다.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고 부적격자를 걸러내려는 진정한 노력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이 비단 특정 인물만의 문제인가? 아니다. 국가를 이끌어야 할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이들은 오직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다음을 위한 이미지 관리만을 할 뿐,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심도 있는 고민이나 비전 제시는 찾아보기 힘들다. 경제는 갈수록 나빠지고, 저출생은 국가 소멸의 위기를 경고하지만, 이들은 무능과 무책임으로 일관하고 있다. 자신들의 안위와 권력 유지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부도덕한 행위도 정당화하고 비호하려는 파렴치한 행태를 서슴지 않는다.

우리는 묻는다. 대체 언제까지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을 지켜봐야 하는가? 당신들은 대체 누구를 위해 존재하고 있는가? 국민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자리라면, 최소한의 양심과 책임감은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국민의 분노를 가볍게 여기는 자들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다.

지금 당장, 국민을 기만하고 대한민국을 병들게 하는 모든 무능하고 부패한 세력들, 그리고 그들을 뻔뻔하게 비호하는 자들은 각성하라. 그렇지 않으면, 분노한 국민의 심판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일회성 민생지원금, 그 허망한 포퓰리즘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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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다시금 불거진 일회성 민생지원금 지급 논란은 우리 사회가 복지 정책의 근본적인 방향성을 상실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개인의 경제적 충격 완화’라는 명분 아래 제시되는 단발성 현금 살포는, 그 실효성 이전에 세금이라는 국민의 피땀 어린 자원이 어떻게 낭비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필자는 묻고 싶다. 과연 이러한 임시방편이 대한민국 사회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합리적인 선택인가?

‘긴급 완충제’라는 허울, 그 뒤의 비효율성

민생지원금의 필요성을 옹호하는 이들은 종종 ‘경제 위기 시 물가 급등에 대한 긴급 완충제’라는 논리를 내세운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 경제 지표는 ‘물가 급등’이라는 비상 상황과는 거리가 멀다. 평상시의 물가 변동을 ‘긴급 완충’의 명분으로 삼는 것은 정책적 오판을 넘어 국민을 기만하는 행태에 가깝다.

더욱이, 일회성 현금 지급은 취약계층이 겪는 만성적이고 구조적인 경제적 어려움을 결코 해결할 수 없다. 단 한 번의 지원금으로 밀린 공과금이나 식료품 구매에 잠시 숨통이 트일 수는 있겠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언 발에 오줌 누기’식의 무책임한 정책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 민생지원금이 결국 납세자의 세금을 걷어 다시 배분하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행정 비용과 더불어, 세금 부과로 인해 위축될 수 있는 민간의 경제 활동과 투자 심리까지 고려하면, 과연 민생지원금을 배부하는 것이 단순히 추가 과세를 취소하여 국민 개개인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세금이라는 귀한 자원을 비효율적으로 소모하며, 그 효과마저 불분명한 정책은 재고되어야 마땅하다.

특히 기초수급자와 같은 특정 계층에게 두 배의 금액을 지급하자는 주장은 더욱 논란의 여지가 크다. 이는 차상위계층 등 또 다른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이들과의 형평성 문제를 야기하며, ‘긴급 완충제’라는 명분조차 희박한 상황에서 특정 계층에 대한 차등 지급은 포퓰리즘적 발상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일회성 넘어, 자립을 위한 지속 가능한 투자로

이제 우리는 일회성 현금 살포라는 손쉬운 유혹에서 벗어나, 취약계층의 진정한 자립과 사회 통합을 위한 상시적이고 구조적인 정책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 단순히 돈을 쥐여주고 ‘생존’에 머무르게 하는 것을 넘어, 이들이 스스로 일어서고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 사회의 능동적인 구성원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야말로 지속 가능한 복지의 핵심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다음과 같은 프로그램들에 과감히 투자해야 한다.

  • 맞춤형 직업 교육 및 재취업 지원: 변화하는 산업 구조에 맞춰 취약계층이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고, 실제 노동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체계적인 교육과 취업 연계를 강화해야 한다. 이는 ‘기초수급에 안주’하려는 기형적 현상을 타파하고, 자발적인 경제 활동 참여를 유도하는 강력한 동력이 될 것이다.
  • 자산 형성 지원: 단순 소비성 지원이 아닌, 개인이 자발적으로 저축하고 자산을 형성해 나갈 수 있도록 정부가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식의 자산 형성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이들이 미래를 계획하고 경제적 독립을 이룰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 심리·정서 및 사회 관계망 강화: 경제적 어려움은 종종 심리적 위축과 사회적 고립으로 이어진다. 전문적인 심리 상담과 지역사회 기반의 자조 모임 활성화를 통해 이들이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정서적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 유형별 맞춤형 일자리 연계: 고령층, 청년, 장애인 등 각 취약계층의 특성과 역량을 고려한 맞춤형 일자리를 발굴하고 연계하여, 이들이 단순히 생계를 넘어 사회에 기여하며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일회성 민생지원금은 단기적인 정치적 효과를 노린 포퓰리즘의 유혹일 뿐이다. 이제는 단발성 지원의 비효율성을 넘어, 국민 개개인이 자립하고 우리 사회가 더욱 견고해질 수 있는 장기적이고 실질적인 로드맵을 그려나갈 때이다. 진정한 복지는 ‘퍼주기’가 아닌 ‘자립을 위한 투자’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NATO 불참의 득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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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견제, 당의 이념적 지향, 그리고 ‘선택과 집중’의 진정한 의미

이재명 대통령의 NATO 정상회의 불참 결정은 한국 외교의 방향성에 대한 중대한 질문을 던진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서방 안보 연대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진 시점에서, 이러한 결정이 과연 국익에 부합하는지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유럽 방산 시장에서 한국 무기를 노골적으로 견제하는 프랑스의 존재는 이번 불참 결정이 초래할 파장을 더욱 심각하게 만든다. 더불어민주당의 전통적 외교 스탠스까지 고려할 때, NATO가 과연 ‘선택과 집중’이라는 명분 아래 포기될 수 있는 대상인지, 그 진정한 의미를 숙고해야 한다.

G7 정상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후 첫 다자 외교 무대에 나서며 ‘정상 외교 복원’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 여러 국가 정상들과의 만남은 한국 외교의 지평을 넓히는 기회였을 것이나, 제대로 활용했는지는 물음표가 있는 상황이다. 뒤이어 발표된 NATO 정상회의 불참 소식은 G7에서 형성된 의구심에 먹구름을 드리운다. 대통령실은 국내 현안과 중동 정세를 불참의 이유로 제시했으나, 국제 사회는 행위를 단순한 국내 사정으로만 해석하지 않는다. 오히려 NATO는 글로벌 파트너로서 한국이 반드시 참여해야 할 ‘선택과 집중’의 핵심 대상이며, 결코 등한시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NATO는 단순한 군사 동맹을 넘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라는 보편적 가치를 수호하는 전 세계적 연대체를 상징한다. 이러한 중요한 회의에 한국의 최고 지도자가 불참하는 것은 유럽 국가들에게 한국이 연대에 덜 적극적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특히 최근 K-방산이 폴란드 등 유럽 시장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두고 있음을 고려할 때, 이는 심각한 문제로 인식될 수 있다.

실제로 프랑스는 한국 무기의 유럽 시장 진출을 노골적으로 견제해 왔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미국산 무기와 한국산 무기 대신 유럽산 군 장비를 더 많이 구매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유럽산 우선 구매’ 기조를 강화하고 있다. 이는 자국 방위산업 보호 및 유럽 내 영향력 유지를 위한 프랑스의 전략적 행보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대통령의 NATO 회의 불참은 프랑스 등 경쟁국들에게 “한국은 유럽 안보 연대에 대한 의지가 약하다”는 강력한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

더욱이 이번 불참 결정은 이재명 대통령이 소속된 더불어민주당의 전통적인 외교 스탠스와도 연결되어 해석될 여지가 크다. 더불어민주당 내 일부 세력은 과거부터 자주 외교를 강조하며 미국 중심의 외교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해왔다. 특히 당내 다선 의원들을 통해 미국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가 강하게 표출되기도 했다. NATO 불참은 이러한 당의 기조, 혹은 미국의 이란 공격 등 일방적인 대외 정책에 대한 불만의 간접적 표출로도 비춰질 수 있다. 이는 국내 정치적 지지층 결집을 위한 메시지일 수도 있지만, 동맹 관계 내에서 동맹 파기를 획책하는 오랜 노력의 연장선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이 외교 파트너들에게는 한국의 대미(對美) 불신이나 특정 진영 외교에 대한 편향으로 해석될 여지가 높다.

정부의 ‘국내 현안 집중’ 주장은 표면상으로는 타당성을 지닌다. 그러나 외교는 국내 정치와 분리될 수 없으며, 국내 현안의 해결 또한 국제 사회의 안정적 협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NATO 정상회의는 전 세계 주요 민주주의 국가 정상들이 모여 안보, 경제, 기술 등 복합적인 글로벌 위협에 대한 공동 대응 방안을 논의하고 각국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핵심적인 플랫폼이다. 이러한 자리에서의 부재는 단순히 ‘선택’이 아닌 ‘전략적 오판’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한국이 강조하는 ‘가치 외교’와의 일관성에도 의문을 제기하며, 국제 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외교적 위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프랑스와 같은 전통적 우방국이자 경쟁국이 한국의 방산 수출을 견제하는 상황에서, NATO 불참은 이러한 견제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NATO 회의 참석은 단순히 ‘보여주기’ 외교가 아니다.

  • 첫째, 우리의 안보와 직결되는 국제 안보 질서 논의에 직접 참여하여 국익을 대변하고 목소리를 개진할 기회를 제공한다.
  • 둘째, 유럽 내 주요국과의 양자 회담을 통해 경제 협력을 심화하고 K-방산 수출을 위한 환경을 조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 셋째, 대한민국의 국제 사회 내 위상과 책임감을 보여주며, 신뢰받는 글로벌 파트너로서의 이미지를 확고히 하는 자리이다.

결론적으로, NATO는 국제 질서의 격변기에 대한민국이 반드시 참여하여 입장을 표명하고 국익을 확보해야 할 핵심적인 무대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NATO 정상회의 불참 결정이 과연 ‘선택과 집중’이라는 명분 아래 대한민국이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기회를 상실한 것은 아닌지, 깊은 성찰과 함께 후속 조치가 시급히 요구된다. 이번 결정이 단기적 정치적 계산이나 특정 이념적 지향에 따른 것이 아닌, 진정으로 대한민국의 장기적 국익을 위한 최선의 판단이었는지는 앞으로의 외교적 성과로 판명될 것 이다.

검찰 독립, 망각된 그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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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 전 대한민국에서 핫한 이슈 중 하나는 ‘검찰 독립’이었다. 정치권 특히 정권의 입맛에 따라 수사 기조가 달라지는 경향을 가진 검찰을 바로 세우겠다는 노무현 정권의 의지 중 하나였다. 권력에서 독립된 검찰은 정치 논리에서 자유롭게 법과 원칙에 따라서만 수사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 당시 정권을 가진 86세대의 화두였다. 노무현 정권 시기는 당시 86세대가 386세대라는 이름으로 정치 주류로 떠오르던 때이다.

그런데 수 십 년의 세월이 흐르고 난 후 86세대는 다시 한 번 정권을 차지하게 된다. 대한민국 역사상 그 세대가 손에 쥔 세 번 째 정권이다. 그리고 이들은 ‘검찰 해체’를 추진하고 있다. 이들이 언제 부턴가 외치던 ‘검수완박’의 완성이다. 거기다가 이들은 ‘민주 세력에 의한 통제’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서 자기 정치 세력의 검찰 통제를 외치고 있다. 어째서 이들은 정 반대의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는가?

의외로 이 문제를 이해하는 실마리는 사건과 조금은 떨어진 곳에 있다. 바로 운동권 진영의 자기 인식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정의를 추구하는 중도적 인간’으로 인식하지만 실제로는 ‘탐욕스럽고 미래 세대를 착취하며 앞 세대의 부정부패를 추구하는 인간’이다. 86세대는 자신의 현실을 절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미화해서 받아들이고 있다. 거기서 모든 문제가 시작된다. 범죄는 저지르는데 자신들이 하면 범죄가 아니거나 적어도 도덕적으로는 범죄가 아니라고 믿는 성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수사기관이 자신들을 처벌하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횡령을해도 임금을 체불해도 자신들은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하기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본다. 이러한 기형적 인식은 결국 문재인 정권 당시 수사권 독립을 당근으로 경찰을 장악하는 것으로 해결책을 모색한다. 그런데 검찰은 쉽게 그 같은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실 경찰에 준 당근이 검찰의 팔다리였으니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경찰은 권력을 장악하면 장악할 수 있는데 검찰은 오히려 원한을 샀으니 권력으로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게 된었다.

그러다 보니 또다시 인식의 왜곡이 일어난다. 검찰은 자기 이익(수사권을 의미한다.)을 수호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세계관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운동권 집단에 대한 수사가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생겨난다. 그러나 경찰 처럼 장악할 수 없으니 검찰의 수사권을 완전히 제거하여 자신들을 수사할 수 없게 만들자는 발상에 이른 것이다.

젊은 시절 혈기 왕성한 시절에는 공정한 수사를 추구하던 86세대는 정작 권력을 가지니 앞 세대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부패한 인간임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과거의 자신에 여전히 취하여 자신들의 부정을 수사하는 수사기관을 원망하고 해체하면서 여전히 정의로운 투쟁으로 인식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태가 작금의 현실이다. 과연 이러한 행태를 두고만 봐야 하는 것일까?

갈라치기, 노예로 가는 달콤한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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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4년 21대 국회에서 구성된 연금특위가 공론화위원회를 꾸려 500명의 시민대표단을 구성하고 공개 토론 끝에 설문조사를 벌인 적이 있다. 이 설문조사는 같은 20대 안에서도 남성들 다수는 재정 안정을 선택했지만 20대 여성 다수는 보장 금액을 늘리는 것을 선택했다. 전자는 젊은 세대의 부담을 다소 줄여주는 방안이고 후자는 노년 세대엔 이득을 젊은 세대에게는 부담을 지우는 방안이다. 왜 20대 여성 다수는 청년이면서 노인을 위해 청년이 희생하는 방안을 골랐을까? 비결은 갈라치기에 있다.

올해 벌어진 국민연금 개악 과정에서 봤다시피 여야 할 것 없이 기성세대 정치인들은 개악에 찬성했으며 소수의 청년 정치인들 중심으로 작은 반발이 있었을 뿐이다. 확고한 세대별 입장 차이가 있었다. 그나마도 거대야당에는 반대 의견이 많지 않았다. 이는 지지 기반의 특성에 기인하는 현상인데 86세대가 청년층을 착취하는데에 좀 더 거리낌이 없고 노골적이기 때문이다. 2030여성의 다수는 야당을 지지한다 그리고 야당이 주장하는 ‘기성세대를 위한 청년 착취’를 지지하는 자기 부정적인 2030여성들은 대부분 야당 지지자들과 겹친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이 거대 여성 집단은 스스로 기성세대의 착취의 굴레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기묘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야당의 갈라치기 전술을 복기하다 보면 2030여성 다수의 이러한 자기 부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야당이 남녀갈등을 부추기면서 그 대상을 전세대로 확대하지 않고 2030세대에 국한시킨 것이 신의 한 수 였다. 운동권 성향을 가진 여초운영진들에 의해서 2030여성들은 4050남성들에는 환호하면서 2030남성들을 경멸하는 분위기에 노출된다. 2030남성들에 대한 이들의 경멸감에 맞추어 야당은 ‘후회강간죄’를 도입 시도하거나 일관적이지 못한 증언으로도 남성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하게 만들 수 있게 제도를 꾸리는 등의 조치에 들어간다. 그리고 2030여성들 다수는 여기에 환호했다.

우리는 이제 2030여성들 다수가 스스로 노예가 되는 메카니즘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저들에게 증오심을 심어주자 일면식도 없는 2030남성도 성범죄자로 사회적 매장이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왜곡된 권력에 만족하고 기뻐하게 된 것이다. 무고의 위험도 없는 확고한 무기를 쥐자 반대급부로 착취의 대상이 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이 현재 2030여성들 다수의 스탠스이다. 이것이 저들이 말하는 ‘더 평등한 사회’의 본질이다.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에서 언급되는 ‘어떤 동물은 더 평등하다’는 표현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이는 저들이 여성이어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증오를 심어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증오에 사로잡히게 된다.

2030여성 다수 집단을 원망할 일이 아니다. 증오를 심어둔 악마를 원망할 뿐이다. 그 악마들이 또 정권을 잡았다. 청년에 대한 기성세대의 착취는 더 강화될 예정이다. 많은 청년들의 자발적 노예화를 앞세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