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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하지 않을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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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권에서도 문재인 정권에서도 그리고 이제는 이재명 정권에서 조차 반복되는 좌파 진영의 주장이 있다. 이들 좌파 정부는 주택에 대한 고율의 세금을 부과했고 그럴 때 마다 고통을 호소하는 국민들에게 특히 세금 금액이 많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강남 지역 은퇴자들에게 “팔고 하급지로 가라.”고 주장한 것이다. 우파 진영은 이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우파 진영 내부에서 가장 엿보이는 태도는 ‘자신들의 책임을 떠넘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맹점이 있다.

또다른 논쟁이 있다. 재개발, 재건축 특히 재개발 그 중에서도 노후 지역을 재개발 할 때 마다 좌파 진영은 “원주민의 복귀”를 주장하고 우파 진영은 “그 집에서 영원히 살 권리는 없다”고 반박을 해왔다. 이게 참 아이러니하다. 두 사례를 비교해 보면 좌우 모두 비슷한 상황에서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유사한 사안에 대해서 이주 사유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완전히 반대되는 주장을 펼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하지만 점입가경인 것은 우파 성향의 유권자들 끼리 논쟁이다. 후자의 논쟁을 근거로 “평소 원주민의 거주권이라는 개념을 좌파 이념으로비판하지 않았느냐.”고 반박하며 타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을 주장하고 이에 맞서는 쪽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솔직히 점수를 준다면 전자에 더 주고 싶다. 헌법상 거주이전의 자유 특히 거주의 자유를 단순히 내세울 거라면 ‘철거민’이라 불리는 원주민 세입자들 역시 머물 권리를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후자에 해당하는 분들은 자신들이 비판하는 사람들의 논거를 제공하는 셈이 된다.

결론 부터 말하자면 [이사는 불가피하겠지만 정부는 강하게 비판할 수 있다.]고 정리하고 싶다. 현실 문제에서 이 사안에서 자택을 매매하고 하급지로 이동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이미 노무현 시기에도 문재인 시기에도 반복되어 온 일이다. 정권이 바뀔 때 까지 버틸 여력이 없다면 불가피한 일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이재명 정권을 강하게 비판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근거는 ‘헌법상의 거주의 자유’를 침해했기 때문이다. 이 칼럼은 읽는 독자들은 ‘어? 평소 주장과 모순된다고 하지 않았어?’라고 의문을 가지실 수 있다. 그래서 설명을 준비했다.

논쟁 당사자들은 간과하고 있지만 재개발로 인한 이주와 세제에 의한 이주는 아주 다른 상황이다. 재개발의 경우 이들이 강요 받는 것은 상대적으로 작은 구역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여전히 지역에 머물 수 있고 이사하는 김에 지역을 옴길 수 있다. 이들은 지역에서 축출당하는 것이 아니라 잔류와 이동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여기서 지역이란 그 사람의 생활의 영역을 의미한다. 이들은 구역만 옴겨 기존의 생활 영역을 충분히 향유할 수 있다. 하지만 세제에 의한 이주의 경우 비슷한 시세를 형서하는 구역은 지역 전체 혹은 인접한 지역 까지 포함한다. 아주 넓은 구역이다. 이 구역에서 벗어나면 자신의 생활의 영역에서 벗어나게된다. 당연히 생활 영역에 잔류할지 선택할 수 없다.

이러한 논증은 결국 재개발 등에서 벌어지는 이주는 헌법상의 거주 이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반면에 세제에 의해 벌어지는 이주는 헌법상의 거주 이전의 자유를 침해하는 큰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이주로 거주 이전의 자유가 침해되지 않음에도 마치 자신이 기존에 거주하던 구체적인 거주 주소에 영원히 머물 권리가 있는 것 처럼 주장하는 – 만약 이를 수용하면 세입자는 임차료 지급하지 않아도 영원히 임차할 권리가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 억지를 비판하는 것과 세제 때문에 선택의 여지 없이 완전히 생활 영역에서 밀려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모순된 태도가 아니다. 다만 좌파 이론과 유사하게 지금의 주소지 – 고가 주택 – 에 영원히 살 권리가 있는 것 처럼 말하는 것은 모순된 태도가 맞으며 비판의 취지가 틀렸다고 보기 힘들다.

세제에 의한 이동은 국가의 의도 측면에서도 비판할 수 있는데 세제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부동산 가격 조절이 목적인 세제 변경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의도는 사람들이 집을 팔게 만들어 공급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것이 다주택자 뿐만 아니라 일주택 거주자들에게도 압력이 가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생활 영역에서 거의 영원히 축출되며 선택의 여지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주 잘 인지하고 있다. 이는 누구 보다 헌법에 의해 행동해야 할 대한민국 행정부가 헌법상의 국민의 권리를 침해할 것을 목적에 포함시켜 제도를 설계한 것이 되기 때문에 심각한 반헌법적 행위이다. 단지 요건을 갖추지 못한 계엄만이 반헌법적 행위가 아니다.

물론 이러한 논리도 맹점은 있다. 만약 행정기관에 의해서 아주 대규모의 재개발을 벌이면 어떻게 보아야할까? 생활 영역이라는 것은 어디 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사회적 합의도 애매하다. 나는 이런 것에 대한 토론도 우리 사회 어느 구석에서 이루어졌으면 하는 희망이 있다.

다카이치 총리의 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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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내각 총리 대신(이하 다카이치 총리)는 2025년 11월 7일 국회에서 야당 의원의 “총재 선거 당시, 대만에 중국이 해상 봉쇄를 실행하면 ‘존립 위기 사태’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를 염두에 둔 것인가?”라는 질문에 “전함을 사용해 무력 행사가 수반된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일본의) 존립 위기 사태가 될 수 있는 경우다. 그런 상황이라면 집단적 자위권을 포함해 대응 가능하다는 것이 제 생각이다.”라고 답변한다.

이는 양안전쟁이 발발시 일본이 개입하겠다는 것을 천명하는 것으로 국제 사회에 받아들여졌다. 대만은 반색하는 반응을 보였고 중국은 극렬하게 끓어오르게 된다. 심지어 오사카 주재 영사는 “참수” 같은 외교가에서 입에 담기 힘든 단어 까지 동원해서 다카이치 총리를 비난했다. 갑작스러운 외교 소용돌이에 일본 외무성은 외교관들을 중국에 급파했고 고압적인 중국 외교관들에게 일본의 외교관들이 굽실거리는 듯한 사진이 공개되어 곤욕을 치뤘다. 중국 정부의 의도적인 망신주기였다. 중국은 그럼에도 부족하여 일본에 단체 관광객 송출을 중단했고 희토류 수출 통제 카드를 만지작 거렸다.

한국에서는 일본을 비웃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우파 유권자들 사이에도 티 나게 미국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줄타기 외교를 해야한다는 주장이 무게를 얻었고 좌파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중국을 건들여서 이득이 없으며 미국 대신 중국과 친해야 경제적 이득이 있다는 여론이 일었다. 특히 이들은 중국과 일본이 서로 한국을 자신들 편으로 두려 외교전을 펼치자 중국에 치우친 좌파 외교 노선이 옳았다며 자화자찬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그런데 갑자기 분위기가 급반전되었다. 다카이치 총리가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치뤘는데 지난 8일 총선이 끝나자 자민당이 단독으로 316석을 얻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역사상 자민당이 얻은 가장 많은 의석수로 자민당만으로도 개헌이 가능한 의석수였다. ‘할말은 하고 당당한 일본’이라는 다카이치 총리의 비전에 많은 일본인들 특히 청년들이 호응한 결과였다. 외교적으로도 성과가 있었다. 총선을 몇 일 남기고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으로서 다카이치 총리와 그가 이끄는 연합에 전면적인 지지를 표명한다”는 지지 선언을 트루스 포럼에 남긴 것이다.

서방세력으로서 중국과의 갈등이 불가피한 일본으로서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낸 것으로서 다카이치 총리는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음은 물론이고 지구 최강대국이자 동맹인 미국으로 부터 ‘가장 좋은 동맹’이라는 인증을 받은 것이다. 미국이 기존의 동맹에 ‘안보 무임 승차’를 불평하곤 했는데 다카이치 총리는 당당하게 일본은 동북아 안보의 한 축을 기꺼이 담당하겠다고 선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이 추구하던 ‘정상국가 일본’의 모습에도 부합한다. 다카이치 총리는 경쟁자 중국의 분노를 샀지만 국민과 동맹 모두에게 호감을 얻은 셈이다.

우물 안 개구리는 바로 한국이었다. 안보에 돈을 더 써야 한다는 미국의 따가운 눈총은 그대로다. 국내에서는 이재명 정부가 외교를 잘했다는 자화자찬이 짧은 유통기한을 끝으로 사라졌다. 대만에게는 여전히 자유진영의 배신자로 남았다. 그렇다고 중국이 한한령을 푼 것도 아니다. 도대체 얻은 것이 없다. 더욱 큰 문제는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 대신의 대승리와 미국과 일본간의 밀월이 한국에 어떤 의미인지, 입지가 좁아지는 것은 아닌지, 아예 관심 조차 없는 국내의 분위기이다. 격변하는 국제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주역으로 여기고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고민하는 사회적 움직임이 필요하지만 우리 국민들은 그저 국내 문제에만 몰입되어 있을 뿐이다.

노예는 시장경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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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신안에는 21세기 대한민국이 맞는지 의심이 드는 관행이 있는데 바로 ‘노예’가 있다는 것이다. 이 ‘노예’란 사람을 강제로 납치해서 정당한 급여를 지불하지 않고 노동을 시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신체 폭행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하다. 신안 만큼 극단적인 수위는 아니지만 방식 면에서 비슷한 제도를 지금 대구경북통합지역에 설치될 [글로벌미래특구]에서 실현시키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구자근 의원 외 24인이 제출한 ‘대구경북특별시 설치 및 한반도 신경제 중심축 조성을 위한 특별법안’ (일명 국민의힘안) 제115조 제3항 제2호에 따른 규제배제특례 중 ‘다른 법률의 적용배제 등에 관한 특례’에 “글로벌미래특구에서는 「최저임금법」 제6조를 적용하지 아니한다.”라는 충격적인 조항이 있다.

대한민국은 자유경제시스템을 채택한 국가로 경제원리에 의하면 노동력을 제공받았으면 이에 대해서 반드시 금전으로 합당한 대가를 치루어야한다. 그리고 완전히 비숙련 노동에 대한 합당한 최소한의 대가가 최저임금이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최저임금 미만의 합당한 금저적 대가는 존재할 수 없다. 임금이 0원이거나 최저임금 보다 작거나 모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동일한 행위이다. 신안과 비교하자면 감금이라는 행위가 없을 뿐인 절반의 노예를 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모든 사회제도가 그렇듯이 최저임금제도도 장점과 명분이 있는 반면 단점도 존재한다. 예를 들면 최저임금 미만의 가치를 가진 저숙련 일자리는 그대로 사라져 버려서 저숙련 노동자의 최하층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고 복지에만 의존해야하는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최저임금에 대해서 이런 단점들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을 말리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일단 우리 사회는 복지제도와 직업훈련을 도입해서 최대한 단점을 보완하고 있고 우리는 이 제도를 폐지하기로 동의하지 않은 이상 최저임금을 전제로 논의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지역의 경제 주체들 특히 토호들은 지역 마다의 경제적 여건의 차이를 이유로 최저임금의 예외를 주장해왔다. 그 중 대구, 경북 지역 토호들도 염전주인 신안 지역 토호들도 함께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대구 지역 경영자들은 부정하고 싶겠지만 “초록은 동색.”이라는 옛말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이들이 말하는 [여건의 차이]라는 것은 막연한 이야기일 뿐 최저임금을 적용하지 않을만한 합리적인 기준을 제시한 적도 없고, 그 기준에 따라 적당한 최저임금의 격차를 제대로 연구하여 발표된 사례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에 대한 합리적인 반박은 오래전에 이루어진 상태다. 첫 째, 대한민국은 영토가 달라 지역간의 경제 여건의 차이가 최저임금을 차별해야 할 정도 클 가능성은 매우 낮다. 둘 째,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그 점을 증명해야 할 책임은 주장하는 쪽 즉, 토호들에게 있다. 셋 째, 비록 최저임금의 적정 가격에 대해서 동의할 수 없더라도 정치적으로 해결하여 인상 속도를 조절할 사안이지 지역별로 차등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넷 째, 최저임금제도 자체가 득 보다 실이 더 크다면 이를 사회적으로 설득하고 폐지를 관철하는 것이 맞다. 가능하다면 말이다.

지역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도 완전히 잘못 생각한 것이다. 최저임금을 훼손하여 발생시킬 수 있는 일자리는 어디 까지나 최저임금 보다 저렴한 더 낮은 수준의 비숙련 일자리 뿐이다. 청년들이 지역을 떠나면서도 얻고자 했던 것은 숙련노동자들에게 주어지는 이른바 “좋은 일자리”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한 시도다. 또한 이러한 비숙련 일자리는 이미 지역에 넘치고 남았다. 오히려 비숙련 일자리를 제공하는 기업들은 일할 사람이 없다며 난리였던 것을 생각하면 떠난 청년들을 다시 고향으로 보낼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없다.

자유경제체제 시스템을 존중하고 그 시스템에 의존하여 사업을 영위하는 경제인이라면 시장경제라는 것을 존중해야한다. 시장경제논리가 자신의 사업을 영위할 수 있게 해줌은 물론이고 자신의 사유재산을 철저히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사업체와 재산이 소중한 만큼 시장경제를 존중해야한다. 그리고 최저임금제가 존재하는 이상 최저임금은 적절한 금전적 대가의 기준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저임금제를 합당하고 구체적인 근거 없이 훼손시키려는 시도는 시장경제에 대한 존중이라고 말 할 수 없다. 그런데 시장경제를 존중한다는 정당, 국민의힘이 최저임금제도의 훼손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탄식을 금할 수 없다.

코스피 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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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피 지수가 5000을 돌파하면서 좌파 진영에서는 ‘재비어천가’를(왜 사람들이 성인 李 대신 이름 가운데인 在를 주로 쓰는지는 필자도 알지 못하겠다. 이재명 대통령의 애칭도 잼통, 잼파파, 잼프이다.) 부르는 분위기다. 이 모든 것은 민주당 정권이 주주성실의무를 도입하는 등 주식 시장을 정상화 했기에 찾아온 결과라는 것이 그들의 논리다. 물론 좋은 일이 있으면 그 시기의 정권이 공을 차지하는 것은 통상적인 일이니 잘못된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또한 보수 진영도 “좌파 정권이라면 경제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믿어왔으니 발목을 잡지 않은 것만 해도 최소 “다행이다.”라고 인정할 필요는 있다. 하지만 좌파 유권자들의 착각은 지적하고 싶다.

첫 째, 증시 전체가 활황이 아니다. 대한민국 경제를 떠받치던 반도체와 더불어 작년 부터 새로 떠오르는 산업이 이른바 “조방원”으로 불리우는 조선, 방산, 원전 분야이다. 이 네 분야가 증시를 강제로 끌어올리고 있는 형국이다. (이를 K자형 양극화라 부른다.) 대부분 국외에서 각광 받고 있는 한국의 산업들이다. 둘 째, 대한민국 실물 경기는 한파 속에 있다. 1월 소매판매액지수는 전월대비 -3.3%이고 자영업자패업자수는 연100만명을 넘어섰다. 개인사업자연체율은 2017년 통계 집계 이후 최악을 기록하는 중이다. 셋 째, 특별히 도와준 것이 없다. 반도체, 조선, 방산, 원자력은 긴 세월 이미 잘 나가던가 해외의 영향으로 갑자기 잘나가게 된 분야들이다. 특히 원자력은 문재인 정권 시절 여당이 탄압하던 분야다.

코스피 지수 5000 달성은 축하할 일이다. 다만 좌파 유권자들의 생각 처럼 ‘민주당이 경제를 잘 운용해서 증시가 좋다.’는 인식은 실제와 거리가 다소 있다. 그러기에는 너무 소수의 분야의 급격한 상승으로 달성한 결과이고 이들 분야를 딱히 민주당이 육성한 바도 없다. 하지만 박수를 받으려면 정권을 가진 좌파 유권자들이 받을 일이지 보수 유권자들의 몫은 아니다. 좋은 일인데 인상 쓸 것도 없다. 다만 상술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해결해야한다. 그렇지 않아 찾아오는 재앙에 대한 원망도 좌파 진영의 몫이 될 것이다.

박근혜와 이해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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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국회 로비에서 단식 중이던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를 방문해서 단식을 중단할 것을 권유했고 장 대표는 이를 받아들여 단식을 중단했다. 고위 당직자들 중 몇몇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박 전 대통령의 방문을 사전에 고지 받지 못했다며 전격적으로 방문한 것이라 주장했다. 몇몇 매체들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10년만의 정치 재게’라는 프레임으로 접근하는 것 같았다. 분명히 정치판 한복판으로 돌아온 것은 맞다. 집권 여당의 비웃음 속에서 단식의 정석을 고집하던 장동혁 대표는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었지만 단식을 풀 명분이 없었는데 이러한 당의 난처한 상황을 한 번에 풀어내 버린 것이다. 과연 ‘선거의 여왕’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던 정치 고수 답다.

몇 일 이 지나지 않아 24일이 되어선 또다른 정치 고수의 소식이 들려왔다. 이해찬 전 총리가 출장을 위해 베트남을 방문했는데 현지에서 의식을 잃어 매우 위중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어차피 반대 정치인들에 대해서는 냉소를 띄우는게 당연한 문화니까 그이들은 제외하고라도 좌파 성향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다지 술렁임이 포착되지 않았다. 정치인들만 반응할 뿐이다. 일국의 총리를 역임했고 그 이후에도 대통령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여러 번 킹메이커 역할을 하며 과파 진영의 절대적인 위치에 군림하던 대한민국 정치판에서 가장 정치력이 강한 인물의 소식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분했다. 그리고는 다음날 오후 5시 20분 경 그의 사망 소식이 타전되었고 그제서야 안타깝다는 반응이 나왔다.

이해찬 전 총리의 떠남은 평범한 유명 정치인의 작고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그가 손에 쥐었던 권력에 비하면 의외였다. 어쩌면 자신의 면모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았기에 권력을 가지고도 대통령에 도전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런데 의외의 반응이 나온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연령에 비해 젊어 보이고 건강한 모습과 나이에 비해 거동이 불편해 보였던 생전의 이해찬 전 총리의 모습을 비교하는 사진이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정치에 푹 빠진 사람을 제외하고는 노화가 다르게 온 것 같다는 반응 정도였다. 그런데 그 비교 사진의 모습이 너무나 강렬하다. 한 때 보수의 몰락을 가져왔다고 지탄 받던 사람이 ‘큰 어른’으로 대접 받고 좌파 최고의 권력자는 먼 타국에서 고국에 비해서는 부족한 의료 시설에서 급히 달려온 동지들에 둘러 싸여 세상을 떠났다.

누구의 삶이 더 나은지는 모르겠다. 동남아 까지 날라올 동지들이 있다는 것 자체로 충분히 행운아일지도 모른다. 다만 비슷한 나이의 두 사람의 모습이 의외였다. 몰락했던 이는 생기가 가득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대단한 권력자는 초라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며 인간사의 영욕은 사실은 모두 의미가 없고 그저 각자 자연의 한 조각들이 아닌가 싶었다. 개인적으로 필자의 나이대의 중년들은 좌파 성향이면서도 이해찬 전 총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젊은 시절 큰 혼란을 안겨준 그에게 원망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우리 나이대의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우리 사회에 무슨 득이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는 그런 것도 다 의미 없게 느껴진다. 오늘 하루만일지 계속 그럴지는 지금으로서는 모르겠다. 다만 노정치인의 평안을 빈다.

보안수사권폐지, ‘사법 정의’의 탈을 쓴 ‘범죄 은폐’의 면허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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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권 독립”, “경찰의 주체성 확립”.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된 단어들이 난무한다. 하지만 그 화려한 포장지를 걷어내고 나면,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사법 정의’라는 거창한 가치가 아니다. 그곳에는 경찰 조직을 장악한 좌파 세력이 자신들의 치부를 스스로 도려내고 덮을 수 있는 ‘면죄부 발행 권한’만이 남는다. 우리가 흔히 ‘보안수사권’이라 부르는 권한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많은 이들이 보안수사권의 폐지를 수사 기관 간의 견제와 균형, 혹은 전문성의 영역으로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이는 본질을 호도하는 순진한 발상이다. 수사의 본질은 범죄를 밝혀내고, 그것을 법의 심판대에 세우는 과정에 있다. 그런데 이 과정을 독점하고, 외부의 감시 없이 자체적으로 종결할 수 있는 권한을 경찰 집단에게 쥐여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그들이 ‘심판받을 죄’와 ‘묻어버릴 죄’를 선별할 수 있는 절대 반지를 끼는 것과 다름없다.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소위 ‘경찰 선에서의 사건 종결’이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이는 범죄 혐의가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수사권이라는 이름의 필터를 통해 특정 세력에게 불리한 사건은 상부로 보고되거나 검찰·법원으로 넘어가지 않고 증발해 버릴 수 있음을 시사한다. 즉, 보안수사권폐지는 범죄를 척결하는 칼이 아니라, 권력과 결탁한 내부의 범죄가 외부로 새어 나가는 것을 막는 방패로 전락한 것이다.

경찰 조직은 본질적으로 상명하복의 위계가 뚜렷한 집단이다. 만약 이 거대 조직의 머리를 특정 정치 세력이나 이익 집단이 장악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들에게 보안수사권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협하는 수사를 초동 단계에서 무력화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혐의없음”, “증거 불충분”. 이 몇 글자의 수사 종결 보고서만 있으면, 거대한 비리도, 조직적인 범죄도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채 암장된다. 이것이 과연 사법 정의인가?

진정한 사법 정의는 권력이 있는 곳에 더 엄격한 감시가 작동할 때 실현된다. 그러나 현재의 보안수사권 논의는 감시를 지우고, 그 자리에 ‘자율’이라는 이름의 ‘성역’을 쌓고 있다. 이는 수사의 효율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범죄 연결고리를 경찰 단계에서 끊어내기 위한(꼬리 자르기) 구조적 설계에 불과하다.

우리는 냉정하게 직시해야 한다. 보안수사권을 둘러싼 힘겨루기는 국민의 인권이나 사회의 정의와는 하등 관계가 없다. 그것은 오로지 누가 수사의 칼자루를 쥐고, 누가 그 칼날을 피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이권 다툼’일 뿐이다.

감시받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 수사권이 특정 세력의 방어막으로 악용될 수 있는 구조를 방치한 채 정의를 논하는 것은 기만이다. 보안수사권 폐지가 ‘범죄 은폐의 면허증’이 되지 않도록, 그 화려한 명분 뒤에 숨겨진 ‘차단과 은폐’의 욕망을 꿰뚫어 보아야 할 때다.

적자재정론의 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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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좌파 진영에서 일반화된 경제논리는 주류 경제학과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재정의 적극적 역할’이라 우기는 이른바 양두구육의 프로파간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적자재정론]이라는 이름을 별개로 붙여준다. 이 [적자재정론]의 문제는 [적자재정론]이 언급하지 않고 감추는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IMF의 ‘속도 조절’은 규모의 제한을 전제로 한다. [적자재정론]은 “IMF가 속도의 조절만 요구하였다.”며 적자 규모에 대한 억제의 필요성을 외면한다. 하지만 IMF가 권고한 ‘속도 조절’은 재정 준칙(GDP 대비 적자 3% 이내)의 엄격한 준수와 가역성 확보를 의미하는 것이지, 무분별한 팽창의 면죄부가 아니다.

둘째, ‘미래 투자’라는 명목 하의 ‘지배구조적 지대 추구’ 문제다. 정부 지출 중 NGO 지원금 및 보조금성 예산이 연간 수조 원대에 달하며, ‘친환경 급식’이나 ‘기본소득’ 같은 복지 컨셉의 사업들이 ‘미래 투자’로 둔갑하여 재정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이는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 아닌 진영 내 ‘나누어먹기’로 이미 변질되었다.

셋째, ‘차환(Roll-over)’의 함정은 숫자로 증명된다. 기획재정부 자료에 따르면, 국채 이자 비용은 2024년 약 32조 원에서 2029년 약 45조 원으로 매년 평균 8.75%씩 급증할 전망이다. 이는 국세수입 증가율을 훨씬 상회하는 속도다. 빚으로 빚을 갚는 행위가 반복될수록 정부는 생산적 투자 대신 ‘이자 돌려막기’에 급급한 구조적 수렁에 빠지게 된다. [적자재정론]은 이 모든 것을 차환으로 해결한다는 발상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드라마틱한 부채의 증가를 낳을 것이다.

넷째, 시장의 자금 흡수 능력은 유한하다. 2025년 국가채무(D2)는 1,273조 원을 넘어설 것으로 보이며, 이는 GDP 대비 48.1%에 육박한다. 매년 쏟아지는 수십 조 원의 신규 국채 물량을 받아낼 투자자와 투자자금은 무한하지 않다. 채권 공급 과잉은 국채 가격 하락(금리 상승)을 초래해 민간의 대출 금리까지 끌어올리는 역효과를 낳는다.

다섯째, ‘저금리 환상’은 끝났다. “금리가 낮으면 부채가 늘어도 괜찮다”는 주장은 변동성 리스크를 무시한 발상이다. 미 연준의 고금리 장기화 기조 속에서 우리 국고채 금리 또한 하단이 높아졌다. 금리가 1%p만 변동해도 추가 이자 부담은 수조 원 단위로 뛴다는 사실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여섯째, 비기축통화국의 한계와 국가 리스크 프리미엄이다. OECD 비기축통화국의 평균 부채비율은 약 54% 선이다. 한국은 이미 50% 선에 근접했으며, IMF는 한국의 부채 증가 속도가 비기축통화국 중 1위가 될 것으로 경고했다. 기축통화국(평균 90% 이상)과 단순 비교하는 것은 시장의 ‘신용 등급’ 체계를 무시하는 위험한 발상이다.

일곱째, 위기 대응을 위한 ‘재정 버퍼’의 소멸이다. 한국은행 분석에 따르면 부채비율이 10%p 상승할 때마다 잠재성장률은 0.5%p 하락한다. 관료들이 빚의 규모를 관리하는 이유는 IMF 외환위기나 전쟁 같은 급성 위기 시 최후의 보루를 남겨두기 위함이다. “위기는 없다”는 낙관론은 가장 위험한 도박이다.

여덟째, 민간 투자의 효율성을 정부가 이길 수 없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성장은 정부의 직접 지출이 아닌, 민간의 창의성과 투자를 뒷받침하는 인프라에서 나왔다. 국가가 직접 거대 자본을 쏟아붓는 방식은 과거 추격형 경제에선 유효했을지 몰라도, 지금 같은 혁신 경제에선 비효율과 관치 금융의 폐해만을 낳을 뿐이다.

[적자재정론]은 “경쟁력 확보를 위해 지금 당장 빚을 내서라도 투자해야 한다”는 단순한 논리를 펴고 있다. 단순한 만큼 굉장히 논리 자체로는 흠 잡을 것이 없고 그럴듯하다. 그러나 이 주장은 실제 시장의 메커니즘과 비기축통화국으로서 대한민국이 처한 통계적 현실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그렇게 외면한 현실은 이 발상을 실행시켰을 때 잔인한 흉기가 되서 대한민국을 직격할 것이다.

누가 홈플러스를 죽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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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홈플러스의 위기가 수면 위로 떠 올랐다. 매각설이 끊이지 않고, 실적은 악화일로다. 혹자는 이를 두고 유통 트렌드를 읽지 못한 기업의 경영 실패라 진단한다. 하지만 절반만 맞고, 절반은 틀린 진단이다. 홈플러스를 비롯한 국내 대형마트의 몰락은, 기업의 실책이라기보다는 정치권이 주도한 ‘대형마트 죽이기’ 정책이 빚어낸 예고된 인재(人災)다.

모든 비극의 시작은 20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골목상권 및 전통시장 보호’라는 명분 아래 도입된 유통산업발전법은 대형마트의 발목에 거대한 족쇄를 채웠다. ‘월 2회 의무 휴업’, 그리고’ 야간 영업시간 제한(0시~오전 10시)’이 그것이다. 이는 좌파 세력이 주도했지만 어떻게 된 것인지 우파 정치인들도 이에 협조했다. 우익 진영 내부에서 불만이 있음에도 무시했다.

정치권은 이 규제로 소비자들이 대형마트 대신 전통시장으로 갈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들은 소비자의 흐름을 완전히 잘못 읽었다. 소비자는 비위생적이고 불친절하며 접근하기도 힘든 전통시장으로 가지 않았다. 그들은 PC와 모바일 화면 속의 ‘온라인 쇼핑몰’로 향했다.

결정적 패착: 물류 거점을 봉쇄하다

규제의 가장 치명적인 결과는, 시대의 흐름인 ‘온라인 배송’ 경쟁에서 대형마트를 원천 배제시켰다는 점이다. 소비 트렌드가 오프라인 매장에서 온라인 ‘배송’으로 넘어갈 때, 대형마트는 사실 가장 강력한 무기를 쥐고 있었다. 전국 핵심 상권에 자리 잡은 수십, 수백 개의 매장 그 자체가 완벽한 ‘도심형 물류 거점(Micro-Fulfillment Center)’이었기 때문이다. 신선식품을 즉각 배송할 수 있는 최적의 인프라였다.

하지만 규제가 모든 것을 막아섰다. 온라인 주문이 폭주하는 심야와 새벽 시간, 그리고 주말 황금시간대에 강제로 문을 닫아야(영업 및 배송 금지) 하는 마트가 어떻게 ‘새벽배송’과 ‘당일배송’ 경쟁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비극이 발생했다. 정치권이 ‘야간 영업 제한’이라는 족쇄로 대형마트의 손발을 묶어놓은 사이, 쿠팡과 마켓컬리 등 이커머스 기업들은 이 규제의 무풍지대에서 수조 원을 투자해 거대 물류센터를 짓고 시장을 독식했다.

대형마트는 이미 가진 물류 거점을 창고로 전락시킨 채, 경쟁자들이 시장을 장악하는 것을 손 놓고 지켜봐야만 했다. 이는 공정한 경쟁이 아니라, 한쪽 선수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작한 경주였다.

시대착오적 규제가 부른 몰락

결국 ‘골목상권 보호’라는 명분은 전통시장을 살리지도 못했으며, 애꿎은 대형마트만 죽이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그 반사이익은 거대 온라인 공룡들에게 돌아갔다. 이것이 ‘규제의 역설’이다. 홈플러스의 위기는 이 자해적(自害的) 규제가 10여 년간 누적된 끝에 받아 든 비극적 청구서다. 소비자는 더 싸고 빠른 배송을 원하는데, 국가는 “밤에는 배송하지 말라”, “일요일엔 배송하지 말라”고 명했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기업은 없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홈플러스의 위기를 단순히 한 기업의 문제로 치부해선 안 된다. 이는 시대착오적인 ‘반(反)마트’ 정책의 명백한 실패다. 소비자 편익을 해치고, 기업의 혁신을 가로막으며, 수만 명의 고용을 위협하는 낡은 규제는 즉각 폐지되어야 한다. 그것이 시장을 살리고, 진정으로 소비자를 위한 길이다.

노동과 건강에 대한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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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점점 부유해지고 있다.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내던 사회에서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사회로 점점 변화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비록 ‘새벽배송금지논란’ 자체는 논란을 주도하는 집단의 숨겨진 의도가 의심된다 하더라도 사회구성원들이 한 번 쯤 생각해볼만한 상황이다. 물론 사회구조의 압력과 개개인의 자유의지가 뒤섞여 어떤 노동을 할지 ‘선택’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선택을 한 각 개인의 존엄성을 존중해야한다. 그리고 그 존중을 바탕으로 동시에 사회적 책임도 공존함을 인정하여야한다. 그것이 겸허한 사회 구성원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일단 사회구성원간에 이 문제를 진지하게 대하기로 합의되었다면 과학적으로 그리고 전방위적으로 연구에 돌입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장님 코끼리 만지기’와 같은 상태에 이를 것이다. 지금 민주노총과 더불어민주당이 내세우는 주장 속 ‘유해성’이 그렇다. 먼저 의사들과 과학자들은 노동을 유해하게 만드는 요소를 최대한 수집해서 정량화 해야한다. 그리고나면 이를 통해 노동과 건강 간의 상관 관계에 대한 ‘모델’을 만들수 있게된다. 그리고나서야 유해성을 어디 까지 허용할건지 사회적 논의를 비로서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어떻게 기준치 이하로 떨굴지 연구해야한다. 아마 기관이 아예 따로 설립되어 수시로 평가해야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어디 까지 강제할 것인지 그리고 어느 부분은 권유와 혜택으로 유도할 것인지도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가야할 길이 멀고 지리한 기다림의 과정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런 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정치 아니었는가 묻고 싶다. 그런 면에서 풋사과보다도 설익은 논리를 전가의 보도 처럼 휘두르고 있는 더불어민주당과 민주노총의 행보는 어린아이의 소꿉장난에 비유하고 싶다.

솔직히 우리 사회가 이것이 가능한 단계로 진입했는지 아직은 갈 길이 남았는지는 필자가 확신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연구와 공론을 반복하다 보면 우리 사회는 어느 사이엔가 이것이 충분히 가능한 상태가 될 것이라 믿는다. 특히 이 아젠다를 보수 진영이 추구했으면한다. 보수 진영은 이 나라의 생존이라는 아젠다를 성공시키고 나서 더 이상 굵직한 아젠다를 설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반공이라는 구호는 여전히 유효는 하지만 과거의 위상을 가지지 못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새벽배송논쟁’은 이미 결론을 정해 놓고 과학적, 의학적 소견을 그 결론을 그럴듯하게 꾸며내는 장식 처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엄연히 ‘건강’이라는 과학적, 의학적 대상을 아젠다로 설정했다면 과학자, 의사들을 전면으로 세워 충분한 연구를 진행하고 그것을 근거로 논쟁을 벌여야한다. 그런데 이권이 걸린 집단들이 이 아젠더를 주도하고 있다. 수 십 년 전 생존 문제를 해결한 이후 대형 아젠더를 가지지 못한 보수 진영으로선 이 문제를 한 번 손에 쥐어볼만하다. 하지만 과연 관심이나 가질런지는 확신이 없다.

구호에 머문 ‘건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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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새벽배송 노동자의 건강권 문제가 사회적 화두로 떠올랐다. ‘편리함’ 뒤에 가려진 노동의 고단함을 조명하고 그들의 건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에 이견을 가지진 않는다. 하지만 이 논의가 과연 진정으로 모든 ‘새벽 노동자’의 건강을 향하고 있는지, 아니면 특정 산업을 겨냥한 칼날인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의 본질은 ‘새벽 배송’이 아니라 ‘새벽 노동’ 그 자체에 있다. 새벽배송 금지를 외치는 이들의 논리는 다른 수많은 새벽 노동자들의 현실 앞에서 길을 잃는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밤샘 수술로 생명을 구하는 의사, 24시간 가동되는 공장의 교대 근무자, 응급 상황에 출동하는 소방관 등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수많은 필수 노동자들의 건강권은 어떻게 되는가? 특정 직업군을 ‘필수’라는 이름 아래 건강권을 희생해도 되는 계급으로 치부하는 오만한 발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는 노동자의 건강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결여된 ‘선택적 정의’일 뿐이다.

더 큰 문제는 ‘금지’라는 극단적이고 단편적인 해법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노동으로 인해 건강이 조금이라도 훼손되지 않는 직업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노동은 필연적으로 정신적, 육체적 소모를 동반하며, 관건은 그 손상을 회복할 ‘충분한 휴식’과 ‘정당한 보상’을 어떻게 보장하느냐에 있다. ‘금지’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순간, 우리는 모든 노동을 금지해야 한다는 논리적 모순에 빠진다. 이런 지적에 “왜 그렇게 극단적이냐”고 반문하는 것은, 자신들의 논리가 가진 극단성을 외면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단편적인 접근은 이 논의의 또 다른 맹점을 드러낸다. 바로 전문가의 의견이 선제적으로 배제된 채 주장이 앞선다는 점이다. 노동자의 건강 문제를 다루면서 정작 신체와 건강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의사 집단의 의학적 소견이나, ‘건강권’의 법적 범위와 한계를 규정할 법률가들의 전문적 검토는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새벽배송 금지’라는 정치적 구호를 먼저 만들어내고, 그들의 허술한 논리가 반박에 부딪히자 뒤늦게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해줄 전문가를 찾는 모양새다. 이는 전문가의 객관적 진단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답(금지)에 전문가의 권위를 이용하려는 본말전도에 불과하다. 이처럼 전문가가 배제되거나 입맛대로 동원되는 토론은 노동 환경의 실질적인 개선 방안 대신 감정적인 여론전에만 매몰되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진정한 노동자의 건강권 보편화에는 관심 없이, 유독 ‘새벽배송’만을 문제 삼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그들의 숨은 의도를 짐작하게 된다. 정치적, 산업적 역학 관계 속에서 특정 기업을 ‘길들이기’ 위한 수단이라는 의심과, 경쟁 구도에 있는 기존 운송업계의 이익을 대변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그들이 휘두르는 ‘건강권’이라는 칼날이 정작 노동자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노동자의 건강을 생각한다면, ‘금지’가 아닌 ‘보장’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노동 강도에 맞는 휴식을 어떻게 실질적으로 확보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퇴근 후 대기와 이동에 소요되는 시간을 줄여 실제 휴식 시간을 늘리기 위한 셔틀버스 시스템의 고도화와 같은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새벽배송 논란은 우리 사회가 노동자의 ‘건강권’을 얼마나 피상적으로 다루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특정 산업에 대한 표적성 공격을 멈추고, 전문가들의 객관적인 참여하에 모든 노동자가 충분한 휴식을 보장받고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보편적 권리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나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해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