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금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청년층은 남녀로 갈려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이 전쟁은 여성들에게 유리해지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기성세대는 다수의 여성들에 의한 온라인 성범죄는 문제제기를 하는 쪽을 힐난하고 비웃지만 다수의 남성에 의한 여성들에 대한 성범죄에 있어서는 즉각적으로 대응하고 큰 분노를 쏟는다. 근본적으로 23쌍의 염색체 중 단 하나의 성염색체를 기준으로 진영을 나누고 자신들이 소속된 그 어떤 집단 보다 심지어 가족 보다 우선시하고 나머지 사람들에 극도의 증오를 보내는 것은 비합리적이지만 수 백 만의 사람들이 이에 열광하고 있는 상황이다.
젊은 여성들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래디컬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의 근원에 대한 토론은 꽤나 흥미롭지만 이 칼럼에서 다루려는 바는 아니다. 다만 이들이 어떤 사고방식으로 무장하고 젊은 남성들을 짓밟고 있는지 그 힘의 근본에 대한 서술을 하려 한다. 이들 집단은 아이러니하게도 19세기 가치관을 가진 가부장제로 무장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져있다. 이들에 있어서 남성은 외부 세력과의 싸움에서 희생해야하는 의무가 있으며 가정의 경제도 전적으로 책임져야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정도로 가부장적인 집단은 한반도 역사에서 존재한 적이 없을 것이다. 고대 한반도는 일부 모계 사회였으며 가장 미소지니가 강력했다고 평가받는 조선 조차도 여성이 경제 활동을 하지 않은 적이 없다.
이들의 가부장적 성향은 여성의 의무에 이르러서도 동일하다. 가부장제의 사상은 여성은 무능한 존재로 보기 때문에 그다지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 그런데 이들 집단은 이를 초월한 가부장적 태도를 취한다. 일반론에 있어서는 “여성도 충분히 사회적 책임을 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각론에 이르러서는 “여성은 여성이기 때문에 의무를 수행할 수 없고 수행해서도 안되며 오직 남성들에게만 책임이 주어져야한다.”라고 주장한다. 가부장제 사회가 주장하던 바와 빼다박았다. 이들은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스스로 의식하는지 “가부장제와는 다르며 오직 ‘다름’을 인정하는 것 뿐이다.”라고 말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모든 ‘다름’이 ‘열등함’으로 해석된다는 것은 자각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이들 집단은 ‘평등 사상’에 대한 독점을 시도한다. 어떤 것이 ‘평등’인지 남성들은 논할 권리를 박탈당했다. 능력이 되어도 배제되고 능력이 되지 않아도 발탁되는 기계적인 ‘성 할당제’는 매우 불평등한 제도이지만 이들 집단에 의해서 ‘평등’하다는 판정을 받았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이 극히 불평등한 제도는 평등한 제도로 인정 받는다. 이는 이들이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인 것과 관련이 있는데 우리 사회의 사회주의 집단은 어떤 대상에 대한 평가를 독점하는 식으로 사회적 갈등에서 우위를 점하는 전략을 쓰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 필자는 의무 경찰 출신이다 – 집회에서 밤이 새도록 경찰을 두들겨 패도 다음날 사회주의 집단과 이들이 장악한 언론이 “평화 시위”라고 정하기만하면 그 시위는 사회적으로 평화 시위로 인정 받았고 죽창으로 경찰관의 얼굴을 찢어 갈긴 인물도 평화 시위에도 불구하고 체포된 억울한 정치범으로 사회적으로 인정 받는 일이 버젓이 일어나는 사회다.
이렇게 조선시대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극단적 가부장제와 평등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앞세워 청년 여성들은 청년 남성들을 아주 갈아내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극단적으로 승리하고 있는 과정에 있다. 필자는 이러한 현상의 배후에는 기성세대의 청년 착취를 위한 전략이 존재한다고 본다. 한국 사회는 계급이 어떤 특징 보다 ‘세대’로 갈리는 특징이 있다. 그런데 오직 청년 세대만 남녀로 한 번 더 갈려 있다. 마치 백인 농장주가 흑인들은 집사 역할을 하는 흑인과 노동을 전담하는 흑인으로 갈라놓고 그들간의 갈등을 이용해 안정적으로 지배한 것과 형태가 유사하다. 86세대의 착취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남성들은 이제 산업화 세대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걸 깨달은 듯 하다. 지난 22대 총선에서 국민의힘을 지지하던 청년표가 대거 이탈했던 것을 보면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