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서 한 어린이가 하교길에 학교 안에서 변을 당하는 일이 생겼다. 그것도 정교사에 의해서 말이다. 사람에게 본디 다른 사람의 죽음은 슬픔으로 다가온다고 한다. 이는 사람 뿐만이 아니라 많은 동물들도 연구자에 의해 사람 처럼 그렇게 느끼는 경우가 목격되곤한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은 유난히 어린 아이에게 더 예민하고 가슴아프게 만드는 것 같다. 수 많은 사람들이 사고나 범죄로 목숨을 잃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구성원들은 더 아파하고 더 애도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이 칼럼을 작성하는 필자 역시 끓어오르는 분노와 직업의식을 슬픔이 짓눌러 반나절 이상 마음을 달래야 했다. 이 아름다운 아이가 세상에서 사라졌다 믿을 수 없기에 저 하늘의 별이 된 것이라 믿기로 하였다.
누가 이 작은 생명을 하늘의 별로 만들었는가? 물론 직접적으로는 살인범인 그 교사의 소행이다. 하지만 그 교사는 심각한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정교사 신분은 너무나 견고해서 학교는 이 예비살인자를 해고할 수 없었다. 수업에 배제하는 것 조차 절차가 까다로워 진행 중에 있었다. 무조건적인 고용 안정만 부르짓는 사회 주류의 활동의 결과물이다. “문제의 인물을 배제할 수 없고 이에 의한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반론에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한다.”는 말이나 늘어놓던 그들은 이 살인의 공범이다.
또 다른 공범은 정신병자들을 사회로 풀어놓은 여야 정치인들이다. 박근혜 정부 당시 정신병원 입원 과정에서의 인권침해가 문제가 되자 좌파를 중심으로 크게 여론이 들끓었고 결국은 좌우가 없이 모두가 동조해서 이들이 사회를 활보하도록 법을 바꾸어버렸다. 일부 반대론자들은 인권도 이해하지 못하는 짐승 취급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도 그리고 레거시 페미니스트들이 여성혐오로 프레이밍한 강남역 살인사건도 이러한 얄팍한 선의가 만들어 놓은 지옥의 결과다. 절차에 문제가 있으면 그 절차를 정교하게 수정해야 하지만 그럴만한 의사도 실력도 없는 대한민국 국민들은 그 보호막을 부숴버리곤 한다. 이 건도 그렇다.
뿐만 아니라 정신질환을 이상하게 곡해하는 한국 사회의 오랜 풍조도 공범이라고 할 수 있다. 우울증 약을 먹으면 우울증이 더 심해진다거나 정신과 진료를 받으면 돈을 위해서 정신질환을 치료할 수 없게 만든다는 믿음이 한국사회에 깊게 깔려있다. 혹은 사회적으로 기피하는 현상을 우려하여 진료를 미루거나 거부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만 호조되면 약의 복용을 끊어 버리고 다시 발병하는 일이 우리 사회에서는 끊임없이 벌어진다. 그리고 많은 강력범죄가 이 단약기간에 발생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가족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다른 가족들이 환자의 복용을 바로바로 끊도록 크게 종용하는 편이다. 그나마 사회적 인식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자의로 약을 끊어 다시 악화되 병원을 찾고 또 자의로 단약하는 일이 무한히 반복되는 환자들이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허망하게 떠난 이 아이가 진정 하늘의 별이 되어 반짝이기를 기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