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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물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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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는 6일 새벽에(인터넷판) “국정원 고위간부 100명 대기 발령”이라는 단독보도를 내고 문재인 정부 당시 정권 성향의 간부들이 보직을 받지 못했고 물갈이 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국정원은 정권이 바뀔 때 마다 부침이 심한 기관이다. 좌파 정권이 집권하면 대대적으로 대북, 첩보 담당자들을 내보내고 북한을 지원하는 브로커 노릇을 하는 직원들을 승진시키거나 뽑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권이 바뀌고 나면 정상화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박지원 전 국정원장은 언론에 인사보복이라고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지만 다시 언급하다시피 이는 문재인 정권에서도 벌어진 일일 뿐만 아니라 바뀐 정부가 국정원을 다시 첩보 기관으로 정비하기 위해서 불가피한 인사조치이다. 조선일보에 의하면 박 전 국정원장의 라인을 탄 사람들이 대거 밀려났다고 하는데 본래 관가에서 누군가의 라인을 탄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사라졌을 때 불이익도 감수하는 일이다. 더욱이 그 대상이 대북송금의 주인공이라면 정권이 바뀌고 나서 내쳐지는 것은 각오했어야 하는 일이다.

공무원은 철밥통이라고 하지만 한직으로 밀려나는 일은 벌어진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고 항변하지만 사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특히 고위 공무원이라면 정말로 그렇다. 자신의 신념과 소신이 필요한 자리이며 어쩔 수 없이 신념과 다른 일을 받아들여야 할지라도 최대한 자기 신념을 피력할 기회가 주어지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한직행을 각오하고 신념을 지키는 선택을 한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그런 선택을 한 이들이 새로운 정권에서 선택받고 있다.

사실 관가에서는 비일비재한 일이기 때문에 당사자들은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저 자신이 만들어 놓은 구도를 새 정권이 바뀌는 것이 싫은 정권은 잃은 자들의 불평일 뿐이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이런 표현을 자주 쓴다. “너네 선거 졌잖아.”

북한 또 포격, 9·19 합의 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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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참모본무는 5일 오후 2시 59분경 북한이 강원도 금강군 일대와 황해남도 장산곶 일대에서 각각 130여발의 포병사격을 가한 것을 포착했다고 밝혔다. 합참은 사용된 무기를 방사포로 추정하고 있으며 포착된 탄착지는 9·19합의에 따라 포 사격이 금지된 해상완충구역 내이다.

이에 따라 합창은 즉각 도발 중단 경고 통신을 수회 실시했다.

국민이 두렵지 않냐는 이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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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5일 오전 국회 본청 당대표회의실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제41차 최고위원회에 참석하여 “야당 파괴에만 몰두 중인 윤석열 정부”라며 정권을 날이 선 어조로 비판하며 “국민과 역사를 두려워하십시오.”고 경고했다. 정치인이 말 끝 마다 국민을 들먹이는 것은 그 직업의 숙명이라고 하지만 이재명 대표가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이재명 대표는 가장 큰 걸로는 대장동 개발 그리고 대장동에 묻혔지만 위례신도시 등 신도시 개발 마다 특혜를 제공하고 지분을 챙겼다는 전형적인 부정부패의 혐의를 받고 있다. 심지어 이른바 ‘대장동 일당’들의 증언도 쏟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중하고 대국민 사과라도 해야 마땅한 입장의 이재명 대표가 오히려 “야당 파괴”를 운운하며 고개를 빧빧하게 들고 국민을 운운하는 것이 어찌 자연스러운 광경일까?

지금 집권여당은 패를 갈라 다투고 있으며 그 갈등이 친이친박의 그것과 비견할만하다. 당은 혼란스럽고 초보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어 무엇을 해도 빈틈이 보인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지지율이 반등했다. 과연 당대표에 취임한지 100일 째인 이재명 대표는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민심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고 있을까? 필자는 회의적이다.

무례와 비판, 비판과 무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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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는 5일 새벽(인터넷판) “‘무례한 언론’을 대처하는 권력의 자세”라는 칼럼을 통하여 MBC와 대립각을 세우는 윤석열 정부를 비판했다. 물론 MBC와 운동권 진영에 대한 비판을 잊지는 않았지만 작고한 엘리자베스2세가 자신에 비판적인 언론인의 의견을 경청하고 수용한 사례를 들며 존중할 것을 요구한 것이 결론이었다. 하지만 이 칼럼은 전형적인 한국인의 ‘인식의 울타리’ 안에 머물고 있다. 한국인은 비판 그것도 자신 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상대에 대한 비판을 무례로 규정한다. 하지만 엄밀히 비판과 무례는 별개다.

MBC는 신랄한 비판을 한 것이 아니라 왜곡을 일삼은 것이었고 결정적인 한 방은 그냥 예의가 없었던 것이다. 슬리퍼를 신고 팔짱을 끼고 대통령을 대하는 것이 어떻게 조선일보가 말하는 “권력에 무례해도 되는 것이 언론”에 해당한단 말인가? 칼럼에 언급했던 것 처럼 조선일보야 말로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운동권 정권의 갖은 핍박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서러움이 지나쳐서 무례와 비판도 구분하지 않고 덮어놓고 감싸는 것은 동업자의식을 뛰어넘은 지나친 공감이다. 언론이 취재활동을 위해선 무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 때나 마구잡이로 무례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언론이 아니라 시정잡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MBC는 아량이 필요한 삼류 언론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굴지의 방송사이자 언론 권력이다. 이러한 강자에 대한 아량을 강조한 것은 조선일보가 지면의 최강자이기 때문일까?

최저임금이 쏘아올린 작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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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물연대가 일몰제인 ‘안전운임제’의 지속 시행을 요구하면서 파업을 벌이고 있다. 사실 개인 사업자들이니 파업이 성립하지 않으나 어떻게 된 것인지 노조도 만들었고 파업도 하며 그러다 보니 노조원이 아닌 사람들을 옥죄기 위해서 쇠구슬을 이용해서 사제총기를 사용하고 협박을 하는 등 수 십 년 째 반사회적인 행위의 연속이다. 안전운임제는 그 출생 부터 기괴하다.

문재인 정부가 경제 문제에는 관심도 없고 능력도 없는 좌파 정치 집단 답게 기업활동을 방해하면서 기업이 아닌 다른 경제 성장 동력을 찾게 되었고 그것이 그 이름도 혐오스러운 ‘소득주도성장’이라는 발상이었다. 이에 최저임금을 급격히 올려 버린다. 최저임금도 필요하고 최저임금 역시 물가가 오르는 만큼 올라야한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한 번에 가능한한 최고로 끌어올렸다. 좌파 정권의 망상은 최저임금을 급격히 올리면 차상위 계층의 임금도 오르고 도미노 처럼 임금이 올라 모두의 임금이 오르고 그렇게 오른 임금이 소비력이 되어 경제를 끌어올리고 기업 없이 협동조합과 개인사업자들만으로 경제가 호황을 맞이할거라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피 땀 흘려 일하고 손에 쥔 임금이 가장 단순한 노동 – 보통 그냥 자리를 지키기만 하는 일을 예로 든다. – 의 대가와 동일해져 버렸을 뿐이다. 사회 각계에서는 이 불공정에 아우성을쳤고 그 중 한 분야인 운송 분야에서는 강제로 운임의 하한을 정해서 운임을 끌어올려 버렸다. 그것이 ‘안전운임제’이다. 그러니까 안전하고는 별로 관계가 없는 최저운임제일 뿐이다.

문제는 최저운임제의 명분이 안전문제였지만 아무런 효능이 없었다는 것이다. 화물차의 사고율은 줄어들지 않았으며 경찰청에 따르면 여전히 안전운임제가 시행되고 있는 2022 상반기에 화물차 사망 사고의 사망률은 64%에 달했다. 삶이 팍팍해서 어쩔 수 없이 과속하고 과적한 것이 아니라 복잡한 사정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걸 합리화 하기 위해서 SBS 같은 경우 화물차 기사 끼리의 설문조사를 근거로 제시하며 안전운임제가 효과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추측을 제시하기도 하는데 좌파 언론인의 처절한 몸부림이라고 밖에는 평가할 수가 없다. 심지어 정부가 강경한 입장을 보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전향적이었는데 일몰 시한을 두 배로 늘리고 그 때 까지 수집된 자료를 가지고 대화를 하자고 제안했으나 화물연대는 당장 상시화 하라고 뻗뻗한 입장을 보였다. 안전운임제가 안전하고 별로 관련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자료는 나오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태도이다.

혹자는 일거리가 없을 때엔 운임이 너무 떨어지지 않겠냐는 물음을 던진다. 그렇게 되면 약간의 고통의 기간이 존재하고 그 기간 동안 종사자의 일부가 현장을 떠나면서 정상화 되는 것이 사회 시스템의 자연스러운 작동 원리이다. 설계론자들은 사회가 실패한 것의 고통을 왜 노동자가 겪어야 하냐고 묻지만 사회가 실패한 것도 아니고 어느 사회도 삶의 긴장을 해소해 주지도 못한다. 사회는 그 간격과 공백을 복지로 채워줄 의무만 있을 뿐이다. 공산주의가 그 잘난 설계주의를 해서 얼마나 크게 실패했는지 교훈을 얻지 못한 군상들의 푸념일 뿐이다. 자영업자들에게는 사업주로의 리스크를 당연하게 여기면서 똑같은 개인사업자임에도 자신들의 우산 안에 들어왔다는 이유로 리스크에서의 자유를 외친다는 것은 내로남불의 끝판왕이다. 온갖 테러행위와 검문검색 폭행 등 공권력 행세를 하며 완장찬 행동 역시 현장의 원성을 듣고 있다. 이 모든 혼란의 시작은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이다. 최저임금이 나쁜 것도 아니고 최저임금의 인상이 나쁜 것도 아니다. 다만 문재인식 최저임금 인상은 나빴다.

취재활동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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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뜸 취재활동에 한계가 있다고 하면 그 누구라도 언론탄압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인 행위는 취재활동 동안에도 여전히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이며 해서는 안될 행동이다. 취재활동이라고 해서 그리고 취재활동에 제약이 없어야한다고 해서 비인간적이거나 비도덕적인 행동을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안되는 행동은 여전히 안되는 것이다. 그 행동이 범죄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어느 좌파 성향의 대안 언론사 구성원이 스토킹을 취재 방법으로 삼아서 구설수에 올랐다. 사실 집요한 취재와 스토킹은 유사한 부분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사법당국에서 스토킹이라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해서는 안될 취재 방법이다. 취재를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집요한 취재를 할 때엔 기자 본인이 스토킹의 범주에 들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취재가 목적이라는 이유로 대상이 스토킹의 고통에 노출되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규제 만능 사회고 그 선봉에는 규제를 외치는 언론이 있었다. 그 언론이 규제의 지역에 들어왔다는 점에서 묘한 광경이다. 필자가 그 당사자인 언론인이라는 점에서도 미묘한 부분이다. 신경쓰이는 것이 하나 생겼기 때문이다.

여의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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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변에서 바라보는 여의도

文의 부동산 尹의 부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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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가격이 급격히 안정화되고 있다. 너무 급해서 안정이라기 보다는 폭락에 가까울까 걱정하는 여론이 일 정도이다. 윤석열 정부에 들어서 부동산 가격이 안정된 것은 보수 정권이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킬 것이라는 시장의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함부로 기존 정책을 뒤집어 가면서 실기하지 않고 적절히 조율해서 부동산 시장 안정이라는 목표를 완수해 나갔다.

혹자는 현 주택 공급량이 문재인 정권 시기 추진한 것이라며 그 공을 돌리려 하지만 천만에 말씀이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재임기 부터 꾸준히 공급을 조여온 민주당이 공급 부족으로 활활 타오르는 시장에 공급을 추진했으니 여기서 부동산 공급은 땔깜을 넣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며 실제로 해당 물량들은 분양할 때 마다 초대박을 쳤다. 보수당이 공급이 키워드라고 했지 공급이 무조건 해결책이라고는 안했다. 언제 어떻게 공급하느냐가 중요하고 보수 정권은 해냈다.

물론 좌파 정권도 해냈다. 부동산 폭등을 추구했고 부동산 폭등의 재료를 넣었으며 폭등에 성공했다. 이들이 부동산 시장 안정과 관련해서 한 일이라고는 ‘부동산 시장 안정’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서 폭등 재료에 붙인 것이 유일하다. 참으로 집권 자격이 없는 집단이다.

책임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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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민은 사퇴하라고 목놓아 외치는 보수언론인들은 문재인시대가 남긴 ‘책임정치’라는 근대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이 언론인들은 사고터지면 사죄하면서 사표던지는게 책임정치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원래 대통령은 국민에게만 책임지는자로서 결과는 선거로 나타날뿐이다.

문재인은 사과한번 안했고 함부로 장관을 사퇴시키지도 않으면서 최고지지율을 유지하되 대선패배와 정권교체로 책임을 졌다. 문재인은 정말 나쁜 정치인이지만, 필자가 가끔씩 문재인덕에 대통령제가 바로 섰다는 말을 하는 이유는 진심이다. 문재인은 책임정치를 제대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국 언론인들이 환장하는 왕조식 책임이 아니라 공화국의 진짜 책임 말이다.

자동화의 세상에 대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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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2002년, 당시엔 스마트폰이라고는 없던 시기였지만 그것과 비슷한 PDA(개인용 디지털 단말기)라는 물건이 있었다. 사실상 이 시기의 PDA폰이 지금의 스마트폰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용자는 소수의 얼리어답터들 뿐이었다. 당시 PDA 동호회에서는 ‘완벽한 인터넷 서핑 환경과 고해상도 컬러 동영상 재생이 가능한 기기’를 궁극의 PDA로 평가하면서 등장 시기가 10년이냐 20년이냐 가벼운 논쟁이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구현한 아이폰은 무려 2007년에 발표되었다. 인간이 상상하고 바라던 것은 바라고 예상할 수 있는 시점에 이미 실현될 시점이 목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AI와 로봇 기술의 발전은 인류가 상상하는 세상의 목전 까지 발전을 이뤘다. 모든 것이 자동화 되는 세상이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예측하기 시작했으며 그러한 시대에 대한 ‘맛보기’ 처럼 고속도로 휴게소 마다 로봇이 커피를 만들어주는 시설을 만날 수 있다. 사실 투자에 대한 경영자의 결단과 능력만 있으면 지금도 수 많은 일자리가 기계로 대체될 수 있다. 문재인 정부의 아집이 만들어낸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이 이러한 결단을 압박하여 서비스업에서 대대적인 일자리 감소와 키오스크 도입이 이루어진 것이 대표적인 현상일 것이다.

수 십 년 동안의 발전의 산물이었지만 대중에는 아이폰이 등장하면서 스마트폰이 갑자기 찾아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갑자기 찾아온 스마트폰은 현대인의 삶은 크게 바꾸어놓았다. 지금도 스마트폰 처럼 자동화에 대한 기술은 차근차근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며 어느 순간 갑자기 현대인의 삶을 크게 바꾸어 놓을 것이다. 스마트폰과 다른 점은 그 변화란 일자리의 박탈을 의미한다는 것에 있다.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사회가 온다면 인류는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지금도 일자리는 생존권의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는데 더 이상 생산에 인류가 필요 없어지는 순간에는 도대체 어떻게 가치를 생산하고 생활을 영위할 것인가?

많은 학자들이 예상하는 자동화 이후의 삶은 인류가 노동에서 해방되고 지적이고 유흥에 가까운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유토피아다. 하지만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일에 종사하는 소수에 의해 지배당하고 간신히 생존만 허락 받는 디스토피아도 예상되고 있다. 이런 세상에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는 미지수이지만 멀지 않은 시대에 불현듯 실현될 것이라는 것 만큼은 분명하다. 최소한 우리 사회는 지금 그 발전의 시간표가 거의 끝에 다달았다는 점을 인지하고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 어떤 사회를 원하는지 치열한 가치 논쟁을 벌여야 할 것이다. 물론 늘 그렇듯이 현실이 닥치기 전 까지는 소수의 사람들만 관심을 가지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