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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식민지 컴플렉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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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중진 의원이 “이제 제발 식민지 컴플렉스에서 벗어나자”라고 발언했다고 한다. 이는 평소 필자의 주장과도 같다. 필자는 항상 “한국인으로서 식민지 컴플렉스가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고 이를 극복해야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래야 비로서 객관적으로 우리 스스로와 한일관계를 평가하고 합리적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럼에도 해당 발언을 비판하고자 한다.

필자의 주장은 상술한 바가 전부가 아니다. 나머지가 있다. “식민지 지배 당시 조선 민중들은 임진왜란의 집단적 기억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은 식민지배의 걸림돌이었다. 현대 한국인들에겐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집단적 기억이 남긴 트라우마가 있으며 이는 한일 관계의 걸림돌이다. 우리는 의도적인 노력 없이는 이 상처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이다.

중요한 것은 이 식민지 컴플렉스라는 것이 현대 한국인의 잘못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한국인으로서 그리고 객관성을 추구하는 지식인으로서 벗어나야 할 대상인 동시에 굴레일 뿐이지 우리가 만든 괴물이 아니다. 임진왜란의 기억이 그랬던 것 처럼 근본적으로 일본이라는 국가가 만들어낸 상처다. 물론 그것이 또 현대 일본인의 잘못이냐고 묻는다면 필자는 단호이 “아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식민지 컴플렉스는 근본적으로 현대의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러니 그들 조상의 잘못을 굳이 일본인들에게 투영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이 컴플렉스를 격는 현대 일본인들도 식민지 컴플렉스를 겪고 이 영향력 하에 있는 한국인의 태도를 원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한국인들이 의도해서 가진 식민지 컴플렉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굳이 원망하고 싶다면 땅 속에 누운 조상을 탓하면 된다.

이 중진 의원의 태도는 “식민지 컴플렉스”를 힐난하는 태도이다. 누가 컴플렉스 따위를 가지고 싶고 상처 따위를 품고 살고 싶은가? 태어나 보니 대한민국의 국민이고 식민지의 아픔을 품은 나라에 태어난 것 뿐인데 그것을 왜 힐난받아야하나? 정서적인 상처는 힐난으로 더 커지고 더 아파진다는 것을 누구나 알지 않은가? 이 의원의 발언이 그래서 정말로 식민지 컴플렉스를 극복하자는 의도로 읽히지 않는다. 그저 가족의 히스테리가 부끄러운 철 없는 구성원으로 보인다.

정말로 우리 사회의 리더라면 구성원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마음의 상처가 낫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함께 이겨내보자.”, “식민지 컴플렉스 자랑스러울 것도 없지만 부끄러울 것도 없다. 다만 그것에 지배당하지는 말자.”

합리적인 69시간 제도 합리적이지 않은 69시간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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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69시간 근무가 가능하게 제도가 개선된다. 최대 주 52시간만 근무할 수 있는 경직된 제도에서 사정에 따라 69시간 까지 초과로 일하고 초과 근무에 대한 휴무가 주어져 일시적인 특수 상황에 기업이 대응할 수 있고 동시에 노동자의 건강도 어느 정도는 확보할 수 있도록 합리적인 타협점을 찾았다. 하지만 산업 현장의 주축인 청년층에서는 부정적인 평가 일색이다. 그리고 그러한 평가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개선안의 면면을 더 살펴보면 개선의 탈을 쓴 개악인 것이다.

첫 째, 아무도 대체 휴무가 제대로 지켜질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왜냐면 이 자칭 개선안의 항목들은 중소기업 기업주들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중소기업 현장에서는 노동과 관련된 법을 밥먹듯이 어기는 것이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52시간 제도가 경직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배후엔 제도 설계자들이 제도가 정교하면 산업현장에서는 이를 악용하려 들 것을 염려한 것이 있다. 이론상으로는 섬세한 조율이 가능하게 개선된 것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제도를 망가지기 쉬운 예민한 기계 처럼 만들 것이다. 청년층은 필요 인원 미만으로 인력을 유지하고 쥐어짜는 식의 중소기업 생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둘 째, 균형의 붕괴다. 산업 현장에는 2대 악법이 있는데 기업주 입장에선 경직된 52시간이지만 노동자 입장에서는 포괄임금제라는 악법이 존재한다. 노동자단체와 중소기업 단체가 서로 언더도그마에 호소한 결과다. 하지만 각자 이득이 되는 악법이 균형을 이루는 미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 때 52시간 제도를 합리적으로 고친다면 일방적으로 기업의 유리함이 우위에 선다. 포괄임금제를 개선하거나 52시간과 함께 불평의 대상인 주휴수당 개선을 함께 묶어 아예 폐지하며 제도 개선을 꾀해야했다. 하지만 노동자 입장 까지는 고려하지 않는 단편적 시선이 지금 까지의 불편한 균형을 깨어 버렸다.

셋 째, 52시간이 노동시간의 기준이 되었다는 것이다. 산업현장에서는 단발적으로 주 52시간 보다 더 노동이 투입될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주 52시간이 적은 시간은 아니다. 주 52시간은 나름 추가 근로 까지 고려한 시간인 것이다. 단지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으려니 경직되게 52시간으로 대못을 밖는 우를 범했을 뿐이다. 69시간 까지 특수한 경우를 상정한 예외가 주어진다면 평시의 노동시간은 따로 산정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그저 69시간이 가능하게 풀어줌으로서 평시엔 52시간 까지는 당연하게 쥐어짤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 버렸다.

사회적 논의를 거쳐 노동자 건강권을 높이 고려한 기준(필자의 소견으론 45시간이다.)을 제시하고 주69시간의 휴무가 의무인 예외를 주었어야 했다. 포괄임금제를 폐지하고 이로서 균형을 맞추기 힘들다면 주휴수당 개선을 묶어서 균형을 맞춰서라도 폐지했어야했다. 또한 결정적으로 주69시간 근무 후 휴무가 주어지지 않는 경우 아주 강력한 철퇴를 마련해야했다. 그래야 너무나도 합리적인 의심을 거두어내고 합리적인 제도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안은 이러한 고려가 없었고 결국 합리성을 잃었다. 명분은 합리적이지만 제도는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사례만 남기고 말이다.

공산국가의 지도자 시진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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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국가들 특징 중 하나는 국가 사무의 많은 부분을 ‘전투’에 비교한다는 것이다. 무슨 고난의 행군이니 하는 것은 너무 유명하고.. 걸핏하면 무슨 전투니 하면서 대중에게 호소를 한다. (심지어 교육조차 전투에 비교하며 애들을 가르친다) 상인들은 보통 그러지 않는다. 경영은 전투와 다른 부분이 너무 많다. 경제활동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신용’이기 때문이다. 눈 앞에 놓인 당장의 이득보다 먼 미래를 보고 고객을 하나 더 늘려야 할 때가 많다.

전투는 그렇지 않다. 부비트랩 같은 거 기가 막히게 설치해서 상대를 유인한 뒤 곤경에 빠뜨려 몰살 시키면 위대한 승리가 되는 것이 전투이다. 이번 기회를 이용할 잔대가리가 승패를 가른다. 베트남 전에서 베트콩들이 굴파고 쇠꼬챙이 파묻고 덫놓고 주민이랑 협잡해 통수치고 그러는 식으로 무려 미국을 몰아내는 게 가능하다. 군인 출신이 창업한 ‘화웨이’에서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고객을 상대로 온갖 스파이짓을 다 해가면서 ‘전투’에 기업활동을 비교한 게 화웨이이다. 결국 그짓거리 하다가 걸려서 지금은 완전히 패망의 길로 가고 있다.

베트남 공산당 보수파 하는 짓을 봐도 눈 앞의 기회를 노려 파트너 속여서 이득 봐놓고 잘했다 칭찬하고 좋아하는 것 같은 경우가 많다. 전쟁을 그런 식으로 이긴 사람들이 지도부를 끊임없이 채워간다는 게 베트남이 가진 가장 큰 한계 중 하나이기도 하다. 모택동 역시 그런 인간이었다. 다른 능력은 없고 그저 전투에서 잔머리 기가 막히게 써서 이기는 인간. 정치적 술수를 통해 정적 제거는 기가 막히게 하는데 수억 인민을 통치할 능력은 없어서 기본 몇천만 씩을 굶겨 죽이는 인간.

시진핑의 세계관은 그런 류라고 본다. 시진핑 집권기동안 그들의 외교부가 보여준 전랑외교 행태도 이를 매우 닮았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시진핑 이전의 공산당은 상해를 기반으로 한 개혁파가 주축이었다. 미국의 방조도 있었고 사실상 중국이 커 나가는 게 당연했다. 지금은 아니다. 시진핑의 공산당은 전혀 다르다. 앞서 말했듯이 그들에게는 경제 역시 전투이다. 이를 직시하고 지금의 중국과는 다르게 봐야 한다. 아직도 고성장을 기대하며 중국으로 달려가는 많은 기업들이 중국의 부비트랩에 걸려 낭패를 볼 것이다.

다수의 가해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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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 한 지역농협에서 간부의 괴롭힘에 한 직원이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런 직장내 괴롭힘과 괴롭힘에 의한 자살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류의 인간들을 겪을 수 밖에 없다. 필자의 관찰 범위 안에서 이런 간부들의 심리는 대부분 부하 직원들을 ‘후문 앞에 팔던 병아리’ 처럼 여기는 것 처럼 보인다. 장난감 처럼 괴롭힐 대로 괴롭히며 즐거움을 얻다가 잘못되는 일이 생기면 그 부하직원이 나약해서 망가졌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자신은 잘못이 없고 자신의 폭력에 멍들고 상처 입은 것 자체도 부하직원의 잘못인 것이다. 자살을 해도 자살한 부하직원을 원망하며 분노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사람을 죽음으로 몬 인간들이 대중의 비판 앞에서 반성한다는 둥 눈물을 보이는 것을 위선으로 여긴다.

그런데 이런 사람만 가해자가 아니다. 그의 권력 혹은 대등한 관계라 해도 그와의 관계를 고려해 그를 제지하지 않고 계속 괴롭힐 수 있도록 먹이감으로 피해자를 던져준 사람들이 있다. 전북 지역농협 사건만해도 농협측은 가해자와 친분이 있는 노무사를 선임한다거나 문제 제기를 해도 인사발령을 내지 않고 계속 괴롭힐 수 있도록 가해자의 욕구에 충실한 조치를 취했다. 이들 역시 공범이다. 이들 모구 처벌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현실은 직접적 가해자 조차도 벌 주기가 쉽지 않다. 사람의 목숨이 스러졌는데 처벌 받는 사람이 없다니 이것이 어찌 정의가 존재하는 사회란 말인가?

산후조리원 논쟁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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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인터넷 공간에서는 산후조리원 논쟁이 벌어진다. 산후조리원이 워낙 곡가의 서비스다보니 반드시 필요하다 아니다를 놓고 언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대부분 의사들은 산후조리원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러한 발언들이 반대론자들의 근거가 되어 산후조리를 쓸제 없는 돈낭비로 몰아넣곤한다.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필수서비스만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그렇지는 않다. 커피도 집에서 내려 마실 수 있지만 치킨집 보다 많은 카페들을 “필요없다.”거나 “낭비다.”라고 말하지 않지 않은가?

산후조리원이 막 도입되던 과도기에 필자의 막내동생이 태어났다. 모친께서는 산후조리원 서비스가 없던 시절 두 번의 출산을 하셨고 충분히 가정에서 회복하실 노하우와 경험이 있으셨음에도 산후조리원을 이용하셨다. 그것은 산후조리원이 반드시 필요해서가 아니라 산후조리원을 이용하면 비싼 금액 만큼의 편리함을 분명히 주기 때문이었다. 장성하여 아이를 기르는 입장에서 발견한 산후조리원이 주는 편리함의 핵심은 두 가지이다. 첫 째는 갓난 아이를 몇 일 동안 직접 캐어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 째는 경험이 축적된 직원들이 빠른 판단과 메뉴얼화 된 프로세스를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비용이 고가라는 지적도 있지만 사실 호텔과 식당의 가격으로 환산하면 비슷하다.

아이를 직접 케어하면서도 산모가 몸을 추스를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굉장한 고통을 수반한다. 필수 서비스가 아님에도 고통을 덜어주고 혹은 편리함을 증진시켜주는 서비스가 존재하고 그 서비스가 일반화 된다는 것은 그 사회가 그 만큼 여유가 있고 발전했다는 의미다. 집이 있고 여관이 있음에도 굳이 특급호텔이 성행하고 집 대신 호텔에서 머무는 호캉스가 일반화 된 것이 사회적 여유와 여가를 향유하려는 욕구 증진을 의미하는 것 처럼 말이다. 아무도 이것들을 폄하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째서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의 고충을 해결해 주는 서비스는 폄하의 대상이 되어야할까?

필자의 의견은 여초 커뮤니티들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당연한 것’ 프레임 탓이라고 생각한다. 남성 특히 가장의 노력과 고통이 수반되는 결과물들을 감사나 혹은 치하의 대상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규정하고 아무리 달성해도 칭찬하지 않으며 혹여나 달성하지 모하면 강하게 질책만하는 문화가 2010년대 중반 부터 폭발적으로 퍼졌다. 이런 당연히 제공해야 하는 것들은 이것 저것 붙어서 일각에서는 결혼할 때 자가 아파트를 남성이 가져오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고 이것이 나아가 “남자친구가 자가 아파트를 살 능력이 없어서 결혼을 하지 못한다.”는 발상으로 이어진다. 고가의 산후조리원도 못해주면 무능이고 해줘도 당연한 것이 되니 이런 풍조에 대한 반발이 산후조리원의 유효성 논쟁이다.

이러한 현상의 배후는 운동권식 문화가 있다. ‘당연한 것’ 프레임 자체가 운동권 일부에서 통용되던 문화기 때문이다. 86세대나 M세대 초반이 청년 시절 불가능에 가까웠던 경제 발전 달성과 비약적인 민주적 절차의 도입은 “당연한 것이라 기성세대에 감사할 것은 없고 기준에 못미치는 청렴한 사회 달성이나 완전한 민주적 절차의 즉시 도입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하고 기성세대는 오직 비판 받을 거리만 있다.”는 논리를 폈던 것이 20대 남성이 운동권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면서 동일한 프레임의 대상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근원이 어떻든 누군가는 어떻든 많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아끼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사회적 논쟁에 묻혀 눈에 보이지 않게 된 것 같아 안타깝다.

국회는 이재명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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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은 여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임시국회를 소집했으나 정작 임시국회는 공전 중이다. 수사가 이재명 당 대표의 목 밑 까지 치고 들어온 상황이니 정황을 살펴본다면 세 살 어린아이도 당대표의 면책특권을 위해 임시국회를 소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민당과 지지자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고 뻔뻔스럽게 분노하는 나머지 국민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세상이 자신들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모든 것이 자신들을 위해 있다고 믿는 운동권식 세계관이 원인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국회도 면책특권도 뭘 저질러도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보호막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국회도 국민들을 위해 존재하며 면책특권도 국민들을 위해 존재하는 국회가 제 기능을 하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절대로 이재명 같은 사람을 수사로 부터 구속으로 부터 자유롭기 위해 존재하는 제도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자기 중심적으로 먼저 생각하는 것이 본성일 것이다. 하지만 그 생각 뒤에는 타인을 생각하고 타인이 보는 자신도 생각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거기에 이르지 않거나 혹은 그것에 이르기 전에 자신을 방어할 온갖 변명으로 잔뜩 무장하는 것이 운동권 진영 내부의 문화다. 그러다 보니 자기 정화도 안되고 이제는 부정부패의 정수로 의심받는 사람들 대표로 세우고 온힘을 다해 지켜내고 있다.

물론 결국에는 이재명 대가 무죄일 수도 있으나 이미 밝혀진 정황이나 증언들이 너무나 많아 법정에서 가릴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단계로 아예 가지 않도록 억지로 지켜내는 것은 사실 법정에서 유죄가 나올 가능성을 그 누구보다 자신들이 두려워한다는 방증이 아닌가? 억울한 유죄가 걱정이 되서 법정행을 원천봉쇄한다고? 보통 결백에 자신이 있는 자들의 행동이 아니다.

경찰은 택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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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어느 경찰관이 염색하고 조악한 문신을 한 – 불량스러움을 묘사한 듯 하다 – 학생들이 거짓 신고를 한 다음 택시 마냥 집에 태워달라고 했다는 글이 올라와 기사화되는데에 이르렀다. 그 만큼 많은 반향을 일으킨 것이다. 해당 글의 백미는 택시 노릇을 거절하자 그 부모라는 사람들이 전화를 걸어서 항의한 다음 온갖 곳에 민원을 제기하고 인터넷을 통해 공론화 하겠다고 협박했다는 것이다.

의경 생활을 하던 필자의 군대시절에도 저러한 일은 비일비재했다는 것이 문제다. 경찰차를 택시 처럼 이용하려는 시민들이 굉장히 많았고 거절 당하면 굉장히 분노하고 온갖 민원을 넣는다. 2년 동안 해당 문제로 민원을 넣은 민원인이 있었는데 그의 민원이 너무나 지독하고 당당해서 그를 실제로 몇 번 태워준 경찰관이 있을 정도이다. 물론 부당하다. 현재 경찰 시스템은 경찰차를 이용한 순찰로 치안을 유지하는데 그의 택시 노릇을 하면 해당 경찰차의 영역은 치안 공백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경찰차를 택시 처럼 이용하려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기가 생각한대로 뭐든 되야 한다고 생각하지 사회 원리나 타인에 대한 배려 같은 것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일 경우가 많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그런 사람들이 점점 큰소리칠 수 있는 사회가 되어간다는 것이다. 물론 어리석은 이야기도 못하는 사회 보다는 할 수 있는 상태가 났다. 하지만 이런 현상을 바라보면 입맛이 쓸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왜 북한 혹은 중국에 충성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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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 진영의 핵심 집단은 북한에 충성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지지 세력 역시 친북혐한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독재정권을 경험하면서 쌓인 한국 사회에 대한 혐오가 기반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와 동시에 6.25 직후 부터 끊임 없이 이어진 북한의 첩보활동의 결과물이다. 이와 관련해서 이른바 ‘강철서신’의 발행자였던 김영환씨가 신랄한 폭로를 가하기도 했다. 본인이 그 첩보활동의 주역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한국의 주류를 혐오하며 이들이 이룩한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혐오한다. 대신 북한에 한 없이 우호적이며 북한의 처참한 현실은 악랄한 한국과 미국이 만들어낸 결과로만 해석한다. 물론 이는 사실과 다르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망상을 ‘실체적 진실’이라 이름 붙이며 믿는 문화가 있기 때문에 별 문제는 되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들어 이들 집단이 중국에 충성을 바치는 현상이 보이고 있다. 원전 생태계를 망가뜨리고 중국이 최강자로 군림하는 태양광 산업을 육성하여 중국의 배를 불려준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태양광이나 풍력 발전기를 충분히 지으면 되는데 왜 원전을 고집하며 원전을 대체할 만큼 충분한 태양광 발전소를 짓지 않느냐.” 같은 궤변을 펴면서 말이다. 실상은 발전 분야 뿐만이 아니라 송전 분야나 기타 에너지 분야 까지 총체적으로 비슷한 행태를 저질렀으며 여소야대인 지금도 진행중에 있다. 전기 버스 분야도 비슷한 행태를 보였다. 그리고 코로나가 창궐했을 때 전 세계가 중국발 입국객을 검사할 때 우리만 반대의 조치를 취해 사회를 혼란으로 몰고 갔으며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중국에 문재인 대통령이 방문하여 속국 취급을 받을 때에도 운동권 진영 차원에서 이를 부정하며 중국을 옹호했다.

이들은 왜 이런 매국 행태를 보일까? 첫 째, 사대의 습성이다. 586세대를 중심으로 하는 운동권 진영은 북한을 추종하던 세력이다. 이런 추종의 습성은 소련이 붕괴되고 소련에 의존하던 북한의 한심한 행태가 이어지자 흔들린다. 그 와중에 중국이 부상함으로서 운동권 세대에게 새로운 추종 대상으로 간주된 것으로 보인다. 둘 째, 공산주의에 대한 선망이다. 소련이 붕괴되고 공산주의는 실패했다는 좌절에 시달리던 운동권 진영은 중국이 국제 사회에서 강국으로 떠오르자 “공산주의는 실패하지 않았다. 소련이 실패한 것이다.”라는 논리를 펴기 시작했고 중국을 ‘성공한 공산주의’로 제시하며 중국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표시했다. 이러한 현상은 그들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던 한국과 서방세계에 대한 지독한 혐오를 부채질했다.

셋 째, 이너서클에 대한 도전이다. 대한민국에 대한 혐오는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이너서클에 대한 혐오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이 정권을 차지했을 때엔 대한민국에 대한 혐오가 매우 줄어드는 현상을 보인다. 이들은 노무현 정권 시절 이 이너서클에 진입하려다 좌절한 만큼 새로운 이너서클을 구축하여 기존의 이너서클을 몰아내려 하는데 원전을 위시로 한 기존의 에너지 카르텔을 몰아내고 중국의 도움을 얻어 태양광 카르텔을 구축하여 그 자금으로 새로운 이너서클의 동력을 마련하려 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중국에 상납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었다. 넷 째, 중국의 첩보활동이다. 중국의 첩보활동은 간단하게는 금전으로 시작하여 포섭이 힘들면 미인계로 함정에 빠뜨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국이 아직 중국의 첩보활동에 대해서는 공개한 적이 없지만 호주, 일본, 캐나다, 미국 등지에서 활발한 첩보활동을 벌이는 중국이 한국을 예외로 했을 리가 없다.

국정원을 회복시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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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대대적인 압수수색으로 대공 수사 역량을 보여준 국정원은 곧 대공수사 기능을 상실한다. 이는 여당 시절 더불어민주당과 문재인 정부의 작품이다. 운동권 정권은 왜 국정원의 대공수사 기능을 잘라내야했을까? 이번 간첩 사건에서 보아 알 수 있다시피 국내에 포섭된 간첩들은 북환과의 접선을 위하여 인터넷을 이용하거나 인적 접촉을 위해서는 해외에서 만남을 가진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이 이 해외에서 만남을 가지는 것이다. 해외 정보 수집 능력은 국정원만이 보유하고 있다. 국정원은 이를 통해 직접 수사에 나서거나 국내 수사 기관과 정보를 공유했다.

간첩들과 운동권 세력은 별개의 세력이 아니다. 애초에 한국을 괴뢰 단체로 북한을 진정한 조국으로 여기는 운동권 세력 내부에서 간첩들은 통일운동가로 대접을 받으며 만약 처벌 받으면 굉장한 존경의 대상이다. 서로 연관성을 부정하는 것은 활동의 연속성을 위해서이지 간첩들을 죄악시 해서가 아니다. 지난 대선 참패로 실패로 돌아갔지만 검수완박으로 검찰의 수사 기능을 뺏을 뻔 했던 더불어민주당과 운동권 세력은 경찰은 완전히 자신들이 장악했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겉으로만 충성하는 척 하면서 캐비넛에는 대공 정보를 쌓아두는 국정원 대신 경찰에게 대공 수사를 맡기면 경찰은 충실하게 이들의 용공활동을 합리화 해주거나 수사를 뭉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경찰에서도 원칙과 국가관에 충실한 수사관이 있을 수 있지만 인적 단절이 벌어질 것이고 기능 이전 과정에서 대공수사 자체가 공백이 발생할 것이다. 결국 몇 해에 걸쳐서 대간첩 기능은 완전히 마비 상태에 빠질 것이다. 대한민국 자체를 혐오하는 – 예외가 있다면 자신들이 정권을 잡은 동안의 대한민국이다. 그 시기 동안에는 운동권 전체주의를 받아들이는 갱생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 이 세력은 그 기간 동안 권력을 장악하고 사회적으로 대한민국을 인정하는 이들을 탄압하여 북한에 충성하는 사회를 건설하고 절대로 교체되지 않는 반독재 권력을 구축하려 한 것이다.

국정원이 첩보 기관인 동시에 수사기관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은 우리 내부에 대한민국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너무 많다는 현실에서 기인한다. 사회 혼란을 막고 북한의 정치 개입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더불어민주당의 정책을 막아세우고 국정원의 대공수사기능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배후에 민주노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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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 건설사에서 퇴사한 MZ세대 A모씨의 증언에 의하면 “헬멧을 벗고 동료에게 헬멧을 벗은 자신의 사진을 찍게 해서 안전 위반으로 신고를 하게 한다. 이런 행위가 비일비재한데 모두 민주노총 산하 건설노조원들이다. 이게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이다.”라고 한다. 이런 방법으로 합법적으로 건설사에게 협박을 할 요소를 만들고 이러한 행위를 하지 않는 대가로 금품을 갈취하는 것이 A모씨가 담당했던 모든 현장에서 예외 없이 벌어진 현상이었다. 정부가 이러한 행태에 강력 대응을 천명하자 전국에서 유사 사례 신고가 이어졌는데 그 피해액수가 1600억원을 넘겼다. 그 절반만 인정되더라도 800억이다. 천문학적인 금액이다.

지난 18일 국정원이 간첩 혐의자들을 압수수색했는데 그들 중 민주노총 주요 구성원들이 압도적으로 숫자가 많았다.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과거 해산 당한 통합진보당의 물주가 민주노총이라는 의견이 팽배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를 함부로 이야기 할 수 없었다. 민주노총은 물리적인 보복을 일삼는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검증할 기회는 사라졌다. 하지만 민주노총 하부 조직 까지 홈페이지 마다 북한과 김일성 삼대를 찬양하는 글이 올라오고 북한의 대남 첩보 조직과의 연대를 공공연히 밝히는 상황에서 해당 주장은 꾸준히 힘을 얻어 왔다. 그리고 이 번 압수수색으로 그 주장들이 절반 쯤은 입증된 셈이다.

물론 이 사회의 부정부패 전부를 민주노총에게 책임을 지울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1600억이 넘는 어마어마한 부정을 못 본 척 넘어갈 수는 없다. 우리 사회가 영원히 싸우고 결국 척결해야 하는 부패의 큰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은 현장의 탐욕과 부정부패의 주역이었으며 용공 분자들 의 근원이었다. 이 두 가지가 빠지면 민주노총은 껍데기만 남을 지경이다. 부정부패와 용공 준동은 우리 사회의 발전을 가로 막는 악의 두 축이다. 결국 사회의 발전 혹은 유지를 원한다면 민주노총을 완전히 척결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민주노총은 범죄 조직이다. 사기, 협박, 갈취도 모자라서 반국가 활동에 심취한 수 십 만 규모의 초대형 범죄 조직이다. 과연 남미의 카르텔들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