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추모는 잘못되었다

한 인간의 죽음은 슬픈 것이다. 그 자가 비록 파렴치한 인간이라고 해도 말이다. 적어도 가족이나 오랜 벗이라면 슬플 수도 있다. 인간에게는 슬퍼할 권리가 분명히 있다. 그리고 슬픔을 느끼는 사람은 추모라는 행위를 할 권리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한 사회의 차원에서 그를 추모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사회는 그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는 정의와 가치관에 따라 작동해야하기 때문이다. 특수관계에 있는 인간을 제외하고는 심각하게 부도덕한 행동을 한 것으로 간주되는 인물에 대한 추모에 동참하는 것은 비정상이다.

박원순 전 시장은 수 년 간 성폭행을 저질렀다고 우리 사회는 받아들이고 있다. 피해자의 상세한 증언 뿐만 아니라 텔레그램 메세지가 집간접 증거로 분명히 자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샤워할 때 속옷 심부름을 해야 한다거나 상습적인 성희롱 등 박원순 시장의 친위세력으로 채워진 서울시청 수뇌부가 여성 직원을 성적인 역할로 밀어넣은 사실도 알려졌다. 물론 일부가 이야기하는 것 처럼 무죄추정의 원칙은 옳다. 하지만 그것은 제도적인 것이다. 예컨데 조주빈에게도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는데 우리 사회가 그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감추지 않지 않은가?

물론 박원순은 사망했다. 우리나라는 망자라 부르며 사망한 사람에 대해서 예의를 갖추는 풍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고금을 통틀어 잘못된 것을 잘못이 아니라고 거짓말을 해 주는 관습은 없다. 대신 다른 관습은 있다. 사람을 찌르던 가족이 금품을 받던 운동권 사람의 부도덕한 행위는 갑자기 사회적 기준이 바뀌어서 아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는 관례 말이다. 이해찬 대표에게 후레자식이라고 욕을 먹은 기자가 우리 이 의원 뿐만 아니라 다수에게 공분을 산 포인트는 운동권 인사의 추문을 정상인 것 처럼 행동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박원순의 행동은 최소한 우리 사회가 평가를 할 수 있을 만큼은 밝혀진 상태이다. 그는 4년 동안 권력을 이용해 한 여성을 철저하게 유린한 인간이다. 이런 인간에 대해서 사회적 평가는 분명하다. 매우 낮은 평가를 받는 것이 마땅하고 같은 행동을 한 인물들은 모두 동일한 평가를 받았다. 그런 사람이 자살로 수사를 피했다고해서 이 사회가 동정한 적은 없다. 그리고 사회가 나서서 추모한 적도 없다. 그런데 지금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운동권 진영이 장악한 대한민국 사회는 박원순을 제도적으로 추모하고있다.

박원순에 대한 추모는 언어로는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폭력이다. 그를 추모하는 사람의 숫자 만큼의 그의 행동에 대한 면죄부며 피해자에 대한 적반하장의 질타다. 이러한 평가가 과연 과장일까? 아니다. 인터넷이라는 익명 공간에 스멸스멸 노출되는 운동권 인간들의 솔직한 표현을 보면 조금의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공영방송의 아나운서라는 사람이 왜 사 년 전에 시작된 성폭행을 이제와서 폭로하냐며 거짓말로 몰고 있다. 팔 년 만에 폭로한 미투에는 지지의사를 보였던 인물이 말이다. 피해자에게 꽂히는 비수가 적어도 수 백 만은 되는 것이다.

인간은 추잡한 존재니 기를 쓰고 감싸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적어도 관청은 옳은 행동을 해야한다. 역겨운 흐름에 맞서야한다. 하지만 권력의 자리에 있는 운동권 인간들은 오히려 이를 부추기고 있다. 운동권은 운동권이기에 옳고 운동권이기에 존경받아야한다. 운동권인지 아닌지만이 옳고 그름의 기준이고 그의 행동도 그에게 고통받은 피해자의 존재도 그 기준이 될 수 없다. 그것이 운동권 집단의 기준이다. 내부의 저항이 다소 있지만 그들 조차 다른 사안에서는 같은 행태를 보였던 사람들이다.

박원순이 운동권 거물이 아니었다면 혹은 자연인이었다면 이런 추모를 받을 수 있을까? 운동권 세상의 참된 진실과 균형잡힌 평가의 맛이 어떠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