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유족들이 인권위의 판단에 불복하는 재판에서 박 전 시장을 성희롱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피해자가 “사랑”을 언급한 지엽적인 부분을 집요하게 따지기도 했다. 고인이 피해자라면 왜 자살했는가 혹은 세상 누가 보아도 성희롱이 명백한 발언들은 어떻게 외면할 수 있는가는 차치하도록 하자. 이러한 행위는 성희로오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인 것은 자명하다. 문제는 이러한 유족의 주장이 유족에 국한된 입장이 아니라는데에 있다. 지지자들을 포함하여 박원순계의 정치인들과 대다수 운동권 성향 시민들의 인식이다. 저들은 왜 저런 인식을 가질 수 밖에 없는지 우리는 고민해 봐야한다. 그런데 운동권 특유의 문화에서 그 힌트를 엿볼 수 있다.
첫 째, 운동권 진영은 ‘나는 절대적으로 옳다.’는 인식이 있다. 일종의 강력한 자기합리화이다. 운동권 깃발 아래 모이면 거리에서 경찰을 때려도 지나가던 시민을 때려도 끝 까지 당당하고 자신을 처벌하는 사법 체계를 준엄한 표정으로 꾸짖는다. 이러한 ‘자신’의 영역이 ‘동지’들로 그리고 나아가 ‘운동권 정치인’들로 확장된다. 더 확장되면 북한, 중국, 러시아 까지 이러한 인식은 확장되어 무엇을 해도 옳다는 결론에 이른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있어 은근히 러시아 편을 드는 것이 그러한 인식의 산물이다. 이러한 매커니즘에 따라 박원순 전 시장은 성희롱을 한 적이 없고 당연히 잘못은 피해자의 몫이라는 인식을 하게 된 것이다.
둘 째, 불리한 진실은 진실로 인식하지 않는 문화다. 운동권 진영에 있어서 ‘나에게 불리한 진실은 기계적 진실, 유리하게 꾸며낸 내용은 실체적 진실’이라는 문화가 있다. 예컨데 이재명 의원에 대한 비리 의혹에 대한 증거들은 운동권은 옳다는 진리를 가리기 위해 조작되었거나 혹은 무언가가 감추어진게 분명한 기계적 진실이다. 하지만 검사들이 음모를 꾸미고 누명을 씌웠을 거라고 누가 먼저 내뱉은 아무 근거 없는 말은 실체적 진실로 순식간에 수 만 명 수 십 만 명에게 전파되어 믿음의 대상이 된다. 박원순 사건도 그렇다. 그가 보낸 성희롱들은 기계적 진실이며 박원순이 억울한 순교자라는 누군가의 말 한 마디는 실체적 진실로 운동권 진영 대다수의 신앙이 되었다.
마지막으로는 박원순계 정치인들의 입장에서 동기를 찾을 수 있다. 자신들의 리더가 처참한 끝을 맞이했던 피해자가 있던 자신들은 권력을 더 누려야겠다는 얄팍한 권력욕이다. 그들은 박원순의 비호 아래서 오직 시위꾼의 경력만으로 요직을 차지하고 그 요직이 새로운 경력이 되어 능력있고 잘난 인물로 포장되었다. 586세대에 불평하는 2030세대에 노력이 부족하고 능력이 부족하다고 준엄하게 꾸짖는 이들이기도 하다. 이들은 그렇게 시위꾼 출신으로서 정무직과 임용직을 전전하며 고액 연봉을 타내며 사회 지배 계급의 노릇을 하는데에 맛을 들였다. 그렇기에 자신들이 실패한 집단인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다시 고위직으로 진출을 꿈꾸게 된 것이다. 계산 해 보면 이런 동기를 가질만한 사람이 수 만에 달한다.
운동권 정치의 신념을 가진 이가 이 칼럼을 접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필자가 나열한 운동권 진영의 문화와 추측할 수 있는 동기가 부정적인 것 일색이라는 불평을 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순수하고 고결한 문화나 동기를 제시해 볼 것을 제안한다. 분명히 단 하나도 제시하지 못하거나 이 칼럼에 적시된 두 가지 문화에 해당하는 내용의 발언일 것이다.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는 부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