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년, 통쾌하지만 불쾌한

42년, 악마와 같았던 성범죄자 조주빈이 선고 받은 형량이다. 그의 범죄 수법은 너무나 악랄하였기 때문에 이 사회에서 영구적으로 격리되기를 바라는 사회 구성원들이 굉장히 많다. 42년이라면 항구적 격리라고는 할 수 없지만 상당히 긴 시간이기 때문에 악귀에 내려질 처벌로 적절한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42년 보다 더 긴 형량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그 보다 짧은 형량을 떠올리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 만큼 조주빈의 행태는 악랄했다. 차마 이 지면에 옴기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불편한 기색을 살짝 노출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형량은 보통의 반복된 집단 강간에 대한 판결에서 보기 힘든 형량이어서이다. 재판부가 여론재판을 한 것이 아니냐는 문제 제기이다. 이는 세간의 오해 처럼 형량이 많다는 불만이 아니다.

여론재판 자체가 사법 정의에 어긋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더 문제는 여론재판을 반복하는 풍토는 이러한 반인륜적인 범죄에 대한 사회적 분노를 범죄자 한 명에게 집중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형량은 정치, 법감정, 법철학, 형평성 등 온갖 요소들이 개입하는 복잡한 대상이고 이를 늘리기 위해서는 길고 지루한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분노는 그 인내를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양분이다. 그런데 이러한 여론 재판은 사회적 분노를 일시적으로 해소 시켜 버리고 형량에 대한 철학적 토론으로 갈 역량을 차단해 버린다. 그렇게 조주빈 보다 피해자들에게 더 끔찍한 짓을 벌인 성범죄자들도 십 여년의 짧은 형기를 마치고 세상에 풀려나는 것이다. 단지 여론의 관심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말이다.

조주빈 개인의 말로는 통쾌하다. 그가 감옥에서 작성한 편지는 논리적으로 옳은 논지로 작성되었기에 더더욱 통쾌하다. 그는 너무나 끔찍한 부류이고 인간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것은 법에 적힌 형량이나 원리원칙이 아니라 그 괴물에 대한 무한한 징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주빈을 격리시킨 사회에서 이 후진적 사법시스템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통쾌함의 사이를 비집고 사회적 현실에 대한 우려와 불쾌함이 스며든다. 아쉬운 것이다. 조주빈 못지 않은 괴물들을 조주빈 만큼 격리시키지 못한다니 말이다. 그것은 사회구성원 모두의 책임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