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

알고보면 사람의 시야는 거기서 거기다. 왕자로 태어난 정용진만 궁궐 속에서 세상을 보는 눈이 도련님 같이 좁은게 아니다. 서민으로 태어난 클리앙 열성유저도 임대주택 안에서 그 나름대로 세상을 보는게 좀스럽게 좁다. 다만 정용진이 보는 주변 계급에 속한 사람은 수천명도 안 되는 반면 클리앙 유저가 보는 주변 계급에 속한 사람은 수 십 만 명 이상일 뿐이다. 시야가 넓어서 사회를 전반적으로 더 멀리 보는게 아니라 좁아 터진 그 세계관에 들어와 있는 동족들이 더 많다는 것이 차이다.

이걸 수 천 명 대 수 십 만 명 으로 세계관이 ‘넓다’고 할 수 있는가? 우주는 중심이 없기에 “내가 서 있는 곳이 중심이고, 내가 볼 수 있는 곳 까지를 우주의 변두리 경계라고 본다.”고는 하지만 그 변두리에 가면 거기는 또 다른 중심이 된다. 내가 있는 위치는 너무 당연한 지상 1층이고 지하에 있는 이들은 인간 이하의 삶을 사는 논외이고 고층이 있는 이들은 끌어내려야 할 기득권인가? 그렇지 않다. 한국에서 아무리 밑바닥이어도 굶어죽거나 처형당하지는 않는데, 북한에서 굶어죽는 정치범수용소 수감자를 1층이라 놓고 비교적 고층에 사는 기초수급자인 자신의 처지를 행복해하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나의 1층에 살 뿐 타인의 1층이 되어줄 수 없다. 모두는 자신만의 1층에 산다. 지하에 처박힌 논외의 삶도 평균에 산입되어야 할 삶이다.

“나는 지상에서 가장 낮은 사람이라 부족하지만, 너는 나보다 높으니 충분하다.”는 그런 기준은 실제론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정용진은 삼성전자를 물려받지 못해 슬플지 모르겠지만 애초에 비교가 되지도 않는 이들은 눈에조차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위든 아래든 그 사람도 사회의 평균을 계산하는데 포함되어야 한다. 회사 동기가 금수저래봤자 남의 회사를 계속 다니며 나와 같은 월급을 받을 어설픈 금수저고 회사를 물려받은 금수저와는 애초에 동기가 될 일이 있었겠는가? 주변은 아무래도 좋다. 주변은 내 위치가 반영된 주변이 고나머지는 우연의 산물이니다. 그러니 그 주변과 우연을 바탕으로 기준점을 삼아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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