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래시가 아니다

한겨레신문이 지난달 17일 중고등학교 남학생들이 페미니즘에 저항하는 내용을 기사화하면서 백래시라고 규정했다. 백래시는 바람직한 사회진보에 저항하는 반동을 의미한다. 굉장히 부정적인 의미이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은 고압적이고 오만한 페미니스트들의 시각일 뿐이다. 자신의 생각은 무엇이든지 옳다는 오만한 사고방식이 상대의 저항을 무조건 반동으로 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 공산주의자들의 태도이기도 했다. 현대 페미니즘이 사회주의의 토양에서 자라온 흔적을 이런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 영향인지 페미니즘은 사회주의 진영의 악습을 또 하나 따라하고 있다. 바로 이중 구조이다. 사회주의 국가들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계급의 타파와 모든 인민의 평등을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온갖 논리를 동원해 공산당원들의 귀족화를 합리화하고 새로운 계급제도를 건설했다. 조지 오웰의 저작 <동물 농장>에 나오는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는 대사가 말하는 모순 그 자체이다.

페미니즘 진영도 마찬가지이다. 페미니즘이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다는 이론이라며 보편적 가치에 기대서 페미니즘을 주입하면서 이를 받아들이고 나면 남성과 여성의 동등성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여성의 특권을 제시한다. 필자는 이를 “여성에겐 더 많은 권리와 더 적은 의무를 남성에겐 더 많은 의무와 더 적은 권리를.”로 요약한다. 이것은 새로운 계급이다. 그럼에도 남성들의 권리는 여성들의 권리 보다 아주 작아지고 여성들의 의무는 남성들의 의무 보다 많이 작아지면 그것이 바로 남녀평등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내세운다. 계급이 존재하는 이상 평등은 애시당초 불가능한데 말이다. 이를 합리화하려고 기울어진 운동장 이론을 내세운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개념은 복잡한 연구 결과를 직관적으로 전달하기 좋은 표현이다. 하지만 기울어진 운동장의 비유적인 요소만 내세워 구체적인 논쟁을 회피하고 무조건 옳은 근거를 제시한 것 처럼 군다. 어떤 논쟁에서도 궁지에 몰리면 기울어진 운동장을 내뱉고는 의기양양하게 승리를 선언하고 돌아서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도망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여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이제 까지 남성 우월적 지위를 누려왔으며 현재 정치 권력을 틀어진 86세대가 이들의 손을 들어주니 자신들이 이론적으로도 완벽한 것 처럼 행동한다.

다시 교실로 돌아와서 요즘 남학생들이 여학생들에 대한 배려를 거부하고 동등한 권리와 동등한 의무를 쟁취하는 이유는 그게 옳다고 교육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페미니즘 교육 과정에서 학습한 것이다. 문제는 앞선 이론의 교육이 완료되면 페미 교사들이 이 이론과 반대되는 남자는 여자를 배려해야하지만 여성에게 남성에 대한 배려를 요구하면 미소지니라는 식의 이중적인 교육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어리석은 사람도 아니고 논리적으로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다. 그리고 본래 아무리 어리거나 늙어도 자신의 이익에 관한 것은 인간은 귀신 같이 불합리한 점을 알아차리는 경향이 있다. 페미니즘이 정녕 남성과 여성의 동등성과 상호 존중을 기본 이념으로 한다면 남학생, 남성들의 반발은 백래시가 아니다. 오히려 페미니즘에 충실한 것이다. 반대로 여성 우위의 계급을 만들자는 이론이 핵심 이념이라면 페미니즘은 백래시 운운할 자격이 없는 인종차별이다. 어떤 것을 선택하던 소년들과 청년들의 반발은 백래시가 될 수 없다. 페미니스트들은 이 현상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자신들의 패악에 대한 대가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