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주의자들의 사상 오버피팅

노동자 컨테이너 압사와 한강 의대생 의문사. 나는 생업 현장의 사고가 감정적으로는 좀더 안타깝게 느껴지긴 하지만 컨테이너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밤에 한강에서 술을 마시다 죽을 수도 있기에 이미 일어난 죽음에 대해 경중이 더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한 학교에서 300명이 한꺼번에 죽든 300개의 고등학교에서 한명씩 모인 배가 침몰하든 비극의 정도가 다르지 않다. 다만 전자가 좀더 감정적으로 다가올 뿐이다.

계급주의자 (계급 타파를 주장하면서도 누구보다도 더욱 모든 일을 계급적으로 생각하기에) 들에게는 이번 일이 정치적으로 호재일 수 있겠지만 노동자라서 관심을 못 받고 부유하다고 해서 관심을 받는게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빈곤 포르노에 더 관심을 쏟는다. 코믹 영화만이 재미가 있진 않다. 공포 영화도 잔인한 범죄 스릴러도 슬픈 멜로 영화도 심지어 학술적인 다큐멘터리 조차도 나름대로 이차적인 재미를 가져다 준다.

슬픔조차도 재미가 있으니 소비되는 감정인 것이다. 사건이 안타까운 것과 별개로 사고인지, 사건인지, 실수인지, 고의인지 미심쩍은 부분이 많은 죽음에 대중들이 더 흥미를 갖는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설령 계급의식에 찌든 대중이라고해도 노동자라서 관심이 없는게 아니고 부유한 의사집안 자제라서 관심을 갖는게 아니다. 장담하건대 평택항 젊은 노동자가 컨테이너 작업을 마치고 한강에서 술을 마시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이 반포 사는 젊은 의대생이 한강에서 술을 마시고 아침에 깨어나 돌아가다가 집 근처의 컨테이너에 깔려 죽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받았을 거다.

물론 우리는 사회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저항해야 한다하지만 부조리가 아닌 것까지 부조리로 인식하는 것은 부조리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상의 오버피팅을 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