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여의도 문학

벌써 15일전이다. 내가 서울시장 투표한지 얼마 안 돼서 여의도에 돌아다닐 때다. 시청 왔다 가는 길에, 여의도를 지나치다 배가 출출해 일단 차에서 내려야 했다. 켄싱턴 호텔 로비에 앉아 내각제를 깍아 파는 노인이 있었다. 차기 대권주자가 누군지 궁금해서 점쳐달라고 부탁을 했다.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거 같았다.

“좀 싸게 알려주실 순 없겠습니까?”

했더니,

“정당 하나 가지고 대권주자를 만들겠소? 비싸거든 다른 데 가서 물어보시우.”

대단히 오만한 노인이었다. 값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잘 맞춰달라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의원명단을 읽고 있었다.

처음에는 뭔가 계산하는 것 같더니, 저물도록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돌려 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알때도 된거 같은데, 자꾸만 더 보고 있었다.

인제 다 됐으니 대충 아무나 불러보라고 해도 못들은 척 대꾸가 없다. 술자리 약속 시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초조할 지경이었다.

“못맞춰도 좋으니 대충 부르십쇼”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당이 자강해야 대통령을 만들지, 아무나 부르면 대통령이 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아깐 정당 하나로 대권주자를 못만든다고 하지 않았소? 노인장, 내각제 하려고 잔머리 굴리는거아니오? 시간이 없다니까요.”

노인은 퉁명스럽게,

“다른데 가서 물어보시오, 난 내각제 주의자가 아니오”

하고 내뱉는다. 분명히 기사에서 내각제 해야된다고 말하는걸 봤는데, 어차피 제대로 말해줄 생각도 없고, 기다린 것도 아까워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 니 맘대로 불러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적폐들만 이득이라니까. 나한테 와서 물어봐야 제대로 대통령이 되지, 깎다가 망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의원명단을 숫제 무릎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조중동에 인터뷰나 하고 있지 않은가. 나도 그만 지쳐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전화를 돌려 기자를 이리저리 불러 보더니 다 됐다고 내 준다. 사실 정하기는 아까부터 다 되어있던 대권후보다.

약속에 늦고 배도 고파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장사를 해 가지고 정치가 될 턱이 없다. 손님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값만 되게 부른다. 상도덕(商道德)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오만한 노인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니 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0선 중진의 기사를 읽고 있었다. 그 때, 사진을 보고 있는 노인의 옆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섬뜻했다. 날카로운 눈매와 입가에 띈 비웃음에 내 마음이 서늘해졌다. 노인에 대한 의혹와 의문이 증폭(增幅)된 셈이다.

뒤늦게 술자리에 가서 노인 이야기를 했더니 친구들은 대권주자를 잘 뽑았다고 야단이다. 검찰에 있는 것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근데 친구의 설명을 들어 보니, 제왕적 대통령제는 의회정치의 종말이며, 반민주적인 제도라는 것이다. 아무나 대권주자를 세우면 건방지게 정치를 하며, 고견을 가진 국회의원들의 의견을 무시하며 자기 정치만 하더라는 것이다. 우매한 대중이 뽑는 대통령이라는게 멀쩡한 놈일 확률이 적으며, 국회의원들의 집단지성이 발휘되어야 대한민국이 세계 제일의 민주국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국회의원들이 모여 만든 촛불혁명의 결과가 이모양이지 않나? 국회의원들의 평균적인 자질이 더 떨어지는 것이 아닐까? 마치 고독(蠱毒)을 만들듯이 지네같은 놈들을 모아놔서 하나를 뽑아야 그나마 나라가 멀쩡히 굴러갈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이야기하자 친구들이 묵묵부답이다. 마치 너같이 정치도 모르는 놈하고 중도와 미래를 논하는 것이 어불성설이라는 태도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트였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감정을 깨달앗다. 참으로 알 수 있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명언에는 이유가 있다. “모든 국가는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Every nation gets the government it deserves)” 이라는 명언이 있다. 사보이아 공국의 철학자였던 조제프 드 메스트르가 러시아의 새로운 헌법에 대하여 쓴 편지에 등장하는 문장이라 한다.

결국 집으로 들어갔더니 마누라가 북어 자반을 뜯고 있었다. 전에 더덕, 북어를 방망이로 쿵쿵 두들겨서 먹던 생각이 난다. 방망이 구경한 지도 참 오래다. 요새는 다듬이질 하는소리도 들을 수가 없다. “북어와 정치인은 삼일에 한 번씩 패야 맛이 좋아진다.”는 격언이 떠올랐다. 박기서가 수제작 몽둥이인 ‘정의봉’으로 안두희를 때려죽인 지도 오래다. 문득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느새 나는 아내의 방망이를 빼앗아 차에 시동을 걸고 여의도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