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학생이 건물에서 추락하는 일이 발생했다. 해당 학생은 생명은 유지하고 있었으나 수 시간 동안 이 학생을 받아 줄 응급실이 없었다. 도시를 내달리던 구급차 속에서 젊은 목숨은 스러지고야 말았다. 119 구급대는 혼신을 다해 연락을 돌렸지만 모든 병원들이 여력이 없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여기서 여력이 없다는 것은 빈 침상이 없거나 해당 환자를 치료할 의사가 없다는 의미이다.
외상 사고가 발생했을 때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의사들은 외과 의사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휴무에 들어가거나 휴무 중 음주라도 하면 치료에 동원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이 외과 의사들의 숫자가 많지 않다. 매체는 전공의들이 외과 전공을 기피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결과에 불과하다. 고용되는 외과 의사 자체가 숫자가 작다. 이들은 격무에 시달리며 외상 환자들을 돌보지만 휴무를 하지 않을 수도 없고 이럴 때엔 의료에 공백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된 이유는 가성비 의료 때문이다. 의사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판단하에 소신 것 진료해야하지만 건강보험공단은 과잉진료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지급할 돈을 삭감해 버린다. 의사들은 삭감 기준은 어디 까지나 ‘가성비 진료’라고 입을 모은다. 법정에서 책임을 면할 수 있는 수준으로 가장 싸게 대응할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공단의 태도는 소신대로 진료하고 알려줄 수 없는 기준에 의해 삭감을 당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가성비 진료’는 수가도 극한으로 깍는다. 이러한 저수가 구조 속에서 병원이 유지되면서 고용할 수 있는 외과 의사의 숫자는 한계가 있다. 외과만 단독으로 간신히 유지되는 것도 아니고 다른 과 혹은 다른 분야에서 수익을 봐서 외과에 투입하는데도 그렇다. 그렇게 외과 의사는 부족하게 되고 어린 생명이 위태로울 때 구해 줄 의사가 부재한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장차 고용할 외과의사들 조차도 사회에 공급되지 않도록 구조적 재앙을 만들어내고 있다.
의사 부족 뿐만이 아니라 응급실 자체의 부족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수가로 유지할 수 있는 응급실의 병상 숫자는 한계가 있다. 대부분 병원들은 제대로 응급실을 유지하기가 힘들어 정부 지원으로 겨우 운영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수가를 정상화하고 야간 진료를 응급실과 분리하자는 주장이 있지만 ‘가성비 진료’와 거리가 먼 방향이기 때문에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가성비는 중요하다. 최대 인원이 혜택을 얻고 개인의 차원에서도 넓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 받으려면 가성비가 필요하다. 이는 의료 서비스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국가 서비스에서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가성비가 극한으로 추구되어 의료 공백을 만들어내면 도대체 의료의 존재 의미는 어디에서 찾는다는 말인가? 이 모든 것이 마냥 병원이 돈을 밝혀서 그렇다는 이에게 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당신 목숨이 달린 일에 돈을 아끼고 싶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