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런 잔임함

본지 필진 이벌얼은 본지의 기고문에서 치사율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는 “정부에서 일을 한다는 사람이 국민 생명을 퍼센트로 보는 순간 그 나라는 생명을 자원으로 하는 사업장과 다를게 없다.”고 한탄했다. 이벌얼군은 본질이자 핵심을 들추고 이야기하는 성향을 가진 평론가다. 하지만 필자는 때때로 근본을 들여다 보지만 눈 앞의 현상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평가하고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 서술하는 것 깊은 사명감을 느낀다.

사실 정확한 치사율을 산정하는데에 깊은 어려움을 느낀다. 중국은 정확한 치사율이 나왔는데 2월 초 기준으로 2.1%였다. 물론 중국의 통계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대상이지만 이는 무시하도록 하자. 다만 중국의 의료체계는 한국 보다 나은 상황은 아니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치사율은 이 보다 낮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벌얼군은 1%로 가정했지만 정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필자 역시 그 보다 나은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기에 2%와 중간점에 있는 1.5%로 생각하기로 했다.

1.5%는 어떤 숫자인가? 1.5%는 백분율이 아닌 숫자로 표시하면 0.015라는 정말 작아 보이는 숫자다. 하지만 차분히 따져보자. 일단 감염인구를 전체 인구의 40%에서 70%로 잡는 추세이기 때문에 그 중간인 55%로 정해보자. 현재 인구는 약 5,178만명이니 5,100만명으로 가정했을 때 55%가 감염이 된다면 2,805만명이 감염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 중 1.5%가 사망한다면 약 42만명이 사망한다는 의미가 된다. 42만명이 과연 적은 수인가?

우한 코로나에 대한 방역을 맡은 운동권 정부가 어떤 상황에서도 중국인들의 입국을 막지 않는다는 운동권 사람들의 만족감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방역의 방향을 검역을 포기하고 의료계를 혹사 시키는 쪽으로 정했을 때 집권여당과 정부 관계자의 입에서 일제히 쏟아진 것은 치사율이 낮다는 발언이었다. 치사율은 작은 규모이다. 그들이 접한 치사율은 약 2%대이고 이는 0.02라는 작은 숫자이니 말이다. 숫자만 보면 말이다.

정부여당은 물론이고 운동권 성향의 사람들은 아직도 구구절절 주장하고 있는 치사율이 낮다고 강조하면서 공포를 가지지 말라는 구호는 어떤 의미인가? 죽을 사람이 적으니 위기감을 가지지 말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적다는 예상되는 사망자가 몇 명이냐면 상기한 가정으로 약 42만명이다. 운동권 진영은 42만명이 죽는 것 쯤은 두려워 할 일이 아닌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인식하는 것을 벗어나 대중에게 두려움을 가지지 않기를 요구했다. 42만명의 죽음을 말이다.

당시 낮는 치사율이 강조되던 맥락과 정치 상황을 되새겨보아야한다. 당시 의료계 주류는 중국발 입국을 제한하고 검역을 강화하자고 주장하던 상황이다. 여론도 이를 지지하는 쪽에 쏠려 있었다. 하지만 운동권 진영은 종주국 중국의 구성원들을 제한의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것에 깊은 불쾌감을 표명했고 이에 호응하여 정부와 여당은 중국인들이 강화된 검역의 대상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정했다. 검역을 강화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국민들에게 설득하면서 한 이야기인 것이다. 42만명이 죽으면 되는 것이니 굳이 중국발 입국을 제한하는 검역 카드는 쓸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심지어 집회도 행사도 취소나 연기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운동권 진영은 공산주의자들이었던 부류인 만큼 공산주의의 속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놀랍게도 수십년간 그들은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자신들의 신념을 지켜왔다. 자기가 당사자일 때만 투철한 자본주의자였을 뿐이다. 공산주의 속성 중에서도 전체주의의 속성은 그들이 가장 열심히 고수하는 태도이다. 공산주의자들은 대의를 위해서 백만명이던 천만명이던 사람이 죽는 것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그런 그들에게 42만명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고작 42만 명 밖에 안죽을 것이니 두려울 것도 최선을 다 할 것도 없다.”고 말이다.

운동권 진영이 42만명을 희생하고도 관철해야 하는 대의는 그들의 만족감이다. 중국인의 입국을 제한하지 않는 것으로 느끼는 만족감 말이다. 바꿔 말하면 중국인들을 제한했다면 느꼈어야 하는 깊은 불쾌감을 피하는 것이 바로 대의다. 인종혐오라던가 실익이 없다던가 하는 것은 이들이 대구에 쏟아냈던 증오와 혐오 그리고 초기엔 실익이 있었을 것이라고 실토한 대통령의 발언을 보아 그들도 믿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위대한 자신들의 위대하고 고결한 만족감을 위해 고작 당신들 중 42만명을 죽음으로 내모는 싼 대가를 치루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있다.

운동권 진영에 있어서 대한민국 국민이란 운동권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42만명 쯤은 죽여 버려도 아무 문제 없는 하찮은 존재다. 한 없이 고귀한 것은 그들의 기분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검역을 포기당했고 감염자 증가 속도를 완만하게 만들어 의료시스템이 감당할 수 있는 규모로 억제할 수 없었으며 그 결과 감염자가 집에서 기다리다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운동권이 권력을 획득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당신이, 내가 그리고 우리가 벌레만도 못한 존재가 된다는 것 말이다.

지금 운동권 사람들은 이런 문구를 구호로 삼고 있다. “나가 모이면 우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야 우리가 된다.” 한국을 위해서 스스로 당신을 포기하라는 촉구이다. 한국을 위한다는 것의 실체가 고작 무능한 운동권 정권이 비판 받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만 말이다. 당신을 버리라는데 어떤 생각이 드시는가?